『왕궁면지』가 나왔다. 이 글은 『삼례읍지』의 마중물. 유원영 신협전북협의회장이며 『삼례읍지』 발간위원장은 곧 거창한 책을 내놓아 도민을 놀라게 할 것이다.
①충남 계룡대 해군본부! ‘별 네 개가 번쩍번쩍’ 해성고등학교 출신 이종호(1965년생) 참모총장이 삼례사람이다.(아래 경칭생략)
②신흥학교를 졸업한 김형민(1907-1998)은 서른여덟에 서울시장을 했고 ③와리 이우성은 1948년 10월 15일 생을 마감했다. 천여 조객이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웃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취토를 했고 그의 집은 안 모 아버지가 불을 질렀다. 자부 유귀례의 친정이 고산면 오산(동봉)이다.
④김○복은 ‘비전향자’임을 당당하게 말한다. ⑤하리 최한주는 국방경비대→탈영→입산→잡힘→수감→석방→양봉인→타관으로 이사… 파란만장이었다.
⑥하리의 3천 석 부자 임병운이 6·25전쟁 중 잡혀 들어가 한말 “난 돈 번 죄 밖에 없는데 왜 이러느냐?”호통을 쳤으며, 이 임씨는 석전·와리 들판에 흔한 뚝생이(뙤똥배기, 뚝새기) 돌을 철 망태에 담아 만경강 둑을 쌓고 논을 일궈 부자가 됐다.
⑦윤건중은 마당(지금 한별고교)에 들어온 이웃집 닭에 총을 쏘았고 ⑧‘삼례공립보통학교 증설에 6년간 1만 6천원을 자담…’ 1936년 황두현의 신문기사와는 대조적이다.
⑨하리교회 문형우 장로는 눈알을 팔아 예배당을 지으려했고 ⑩이수길 신금교회 장로는 부인과 상의 한 마디 없이 삼례도서관과 전 보건소 터를 군청에 선뜻 내놓았다.
⑪지주 박기순은 철길을 틀어 삼례역을 자기 땅에 세워 ‘한국에서 가장 굽은 곳… 이래서 전국 기차 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⑫신탁리 한국렬은 ‘자유당원증’을 보여줄 정도로 개방적이며 ⑬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이 우리고장 사람이다.
⑭1918년 김창언 여러 형제가 간도로 이사, 그 아들 김춘배는 1927년 정의군에 가감 총을 들었고, 1934년 북청경찰서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털어(총6, 권총2, 실탄800) 무기징역 결국 옥사를 했다.
⑮박순옥은 석전리 물방앗간에서 전동기를 돌려 전기를 쓴 사람. ⑯모 씨는 김종복과 함께 입산했었고, 여순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박용근이 주선하여 살아났다.
⑰권춘은 비봉면 금곡(쇠노실)에 살다 삼례로 이사했는데, 웃리(석전, 수계, 청동 등지) 사람들이 ‘읍내’에서 행패를 당할 때 이들을 도왔고 옛일을 잊지 못하는 웃니 주민들 그 아들(권창환)을 지지하여 도의회에 보냈다.
⑱삼례 농민은 만경강 물과 싸웠고 지주↔소작인 편한 사이가 아니었으며, 배운 사람은 이 문제 해결책으로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와리에 전주경찰서 주재소가 들어섰음은 치안역사에 처음 일이었다. ‘양종(陽種)-균형-공평’이 바로 삼례정신이다. 읍민은 하나로 뭉쳐 밀어주고 도와줘야 한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