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은 그해 12월 비준서가 교환되어 주권 상호존중과 호혜·평등 원칙에 따른 국교정상화가 실현됐다. 올해가 ‘국교 60주년’이라며 시끌벅적하는데 역사책 다시 펼쳐봐야 한다.△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세 발의 총소리, 이어 네 발 총성이 울렸다. ‘대한제국 의군 중장 안중근!’ 여기는 ‘중국 하얼빈’ 땅, 쓰러진 자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히로부미/ 1841년생)‘, 가장 놀란 관리는 동행자 ’러시아 재무부장관 콥코체프‘. 안중군의 신변은 여순 ’관동 도독부‘로 인계됐다(참고:정진호 장편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191p). △이등박문 왜 죽어야 했나? 정조론자(征朝論者)이었다. △1907년 이등박문은 조선 통감(統監) 부임 초기 외국 선교사들을 불러 모아 ’조선 지배에 이용할 목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편 제 본색을 드러냈다. “선교사 여러분! 내 나이가 위이니 말 쉬고 편하게 합시다.“ 유창한 영어로 처음부터 휘어잡았다. 이토는 ”나 조선을 물리적으로 지배 할 터이니, 당신들은 정신적으로 조선인을 지배하시오“, ”우리 일본 조선 지배 3대(명치-대정-소화) 이리저리 40년 밖에 못합니다. 그 다음은 미국 대통령 임기 4년씩 20대 80년 마음대로 하시오“. 선교사들마다 이토 입만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40년 지배한 뒤엔 미국·러시아 달라지고 ’조선‘ 남북으로 쪼개져, 북은 러시아 영향권일 것이며, 나 언제까지 살지 모르나 남쪽은 미국과 밀접해져 동북아 정세 요동칠 것입니다.“ 100년 이상을 예언가처럼 꼭 집어 이야기한다. △안중근 의사를 가장 힘들게 한 일은 여순 감옥 옥장(구리하라)이 의도적으로 넣어주는 신문 때문이다. ’모든 신문이 이토 죽음을 애통‘한다. 순종은 이토에게 ’문충공‘ 시호를 내렸다(上幸統監府親弔諡博文爲文忠公). 이완용은 순종·고종의 사죄 특별조문단을 데리고 배를 띄워 대련에 갔으나 일본인의 분노를 의식해 정박조차 못하고, ‘이토 유해 실은 아키쓰시마 호가 일본을 행해 가는 도중 해상에서 보트를 타고 배에 올라 영전 앞에 엎드려 굴욕적인 조문을 했다. △1909년 11월 4일 이토 장례식을 위해 사흘간 전 국민이 음주가무를 금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한국민을 대신해 사죄한다는 무리가 한성으로 몰려들었다. 조정에서는 이토 가족에게 사죄비 명목으로 10만 냥을 보냈다. 이완용은 비 내리는 장충단 공원에 한성 각급 학생들을 불러 모아 ‘문충공 이등박문 전하께 올리는 조사’를 울음 섞긴 목소리로 읽혔다. 안중근 의사의 묘 서울 효창공원에 있으나 실묘(實墓) 아니다. 광복 후 둘러보니 실전(失傳) 백방으로 수소문 중이나 감감 무소식이다. 안 의사 권총 든 때가 30 살이었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