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안대군은 평생 한(恨)을 지니고 사셨다. 마음 여린 자손들의 ‘아픈 얘기 하지 말자’는 의견 지당하나 알아야 할 역사는 행장(行狀)에 다 있으니 일반사항을 소개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392년 아버지(이성계)가 조선을 열어 임금이 되실 때 춘추 57세(이하 만으로)이었고 넷째 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 본인은 스물여덟이었다. △1401년 동생 방원(태종)이 3대 왕이 될 때 회안대군은 서른일곱 △이때부터 1421년 56세로 종세할 때까지 20년간 파란만장 고달픈 귀양생활로 △토산-익산-홍주-순천-전주 등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가정마저 평탄치 않아 ▲초취 여흥민씨:생 1자) ▲재취 밀양황씨(생 1자 2녀) ▲3취 김포금(琴)씨(생 2자) 세 번 장가를 들었으니 처복도 없는 편이다. △묘는 전주시 금상동 법사산(法史山)에 있고 재실이 광감재(曠感齋)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품성이 온유한 편이다. 대군은 스스로 맹세하기를 “나는 죽을 때까지 한강 물을 건너지 않을 것이니 ‘자손들 절대로 벼슬하지 마라’고 가르쳤다(大君自誓曰:吾終身不復渡漢水 亦有遺敎子孫 不仕之訓).” 눈물겹다. 당시 일부 전주 사람들은 불우한 회안대군을 너그럽게 받아드렸다. 묻히신 산 이름이 ‘법사산’. 누군가는 이 산이 ‘법(法)’이요, ‘역사[史]’라 단언한 게다. 여러 백성들이 ‘임금’으로 여겼다고 본다. ‘용진(龍進)’이란 이 이름 보통 뜻이 아니다. “회안대군은 반드시 ‘왕위[龍]에 올라야[進]’”한다는 신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부른 이름이다. 회안대군 어떤 인물이기에 국민들이 이렇게 적극적이었나. 군호(君號) ‘회안(懷安)’을 보자. 회(懷)는 ‘품다(藏也)’, ‘생각하다(念思)’, ‘평안하다(安)’, ‘상하다(傷也)’, ‘싸다(包也)’의 뜻이다. 품성 그대로가 함축된 군호이다. ▲동생 태종에게 전주(봉동) 생강을 보냈으며 ▲조카 세종이 오라했을 때 가기 싫었으나 집을 나섰다. ▲가지고 다니던 아버지(태조) 진영을 별말 없이 내주었다. 세상사 ‘미워는 하지 않되 잊지는 말자’고 했다. 자손들 이 논리대로 짠한 마음을 놓지 말 것이며 회안대군 행장 여러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맘을 열어 봉강사(鳳岡祠)를 정갈하게 관리해야 한다. 유림과 자손 식자들이 나서 회안대군 위상을 넓여 봉강서원과 강당, 관리사를 아름답게 꾸며야한다. 문화재 지정은 행정 사무이고, 숭모심은 우리의 몫 정신활동이다. 삼례 호산서원 강당보수를 환영하며 사당 보수가 시급함을 알린다. 유림, 봉사단체, 지식인이 둘러보고 생각이 있으면 지갑을 열어야 한다. 요사이 통문도 애원도 사라지고 맨 욕설만 난무한다. 아무리 바빠도 회안대군이 조선 왕족 가운데 한강 이남 최고 어른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13: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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