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합병이 되고 전라도 일원에 이른바 ‘남한 대토벌작전’을 펼쳐 헌병경찰은 한민족 애국지사를 닥치는 대로 끌어갔다.
일단 잡혀가면 △고문에 몸이 상하고 △감옥살이에 살림이 날아갔으며 △목숨을 빼앗겼다.
이 세 가지 고초를 몽땅 겪은 인물이 완주군 비봉면에 있었으나 기억도 이야기도 기록도 점차 사라져 애석한 죽음으로만 치부되니 통분할 일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한말 의병(義兵) 이원옥·이순옥(李順玉) 형제이다.
1910년 두 청년은 외숙 유치복(柳致福) 의진(義陣)에서 간부로 활약하다 잡혀 징역형 15년 언도를 받아 형님은 옥사했으며 아우 순옥은 11년만에 출옥하자마자 자결했다.
국권 침탈에 맞서 외숙을 따랐던 양인은 결국 이 꼴이 되었다.
원옥·순옥 형제의 처참한 사연이 1925년 9월 22일자 낡은 신문철 속에 묻혀 바래가고 있다.
순옥 씨 감옥에서 나와 보니 집과 살림은 간 데 없고 처는 개가했다. 의사의 최후 선택은 오직 자결뿐이었다.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볼때기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해방된 우리 민족들은 분단에 전쟁을 치르다보니 애국지사가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다.
뒤 늦게 사정하여(?) 1991, 1999 양년에 유치복과 그 생질에게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이 내려졌다.
모든 걸 다 빼앗긴 고인에게 내린 예우이다.
유치복 의병장은 다행히 열인 씨족이 있어 1982년 내월리 입구에 ‘고흥류씨일문9의사 사적비’를 세워 그 이름을 알렸으나 이씨 형제는 젊은 나이에 죽고 챙겨줄 사람 없으니 그냥 묻혀버렸다.
옛날 유림들은 정려와 사우를 세워 충효정열을 선양했는데 이젠 그런 저력도 의기도 사라진지 오래이다.
이런 변화에 대체할 새 세력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재력이 있고 모여서 이야기할 사람이 많다.
시골 목회자는 고장 위인을 찾아 추모케 하며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면 자신이 먼저 높아지고 여러 복을 듬뿍 받을 것이다.
식민통치 그 기간에는 알아도 말 못했고, 독립 후엔 싸우느라 잊었으며 이젠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교회에서 나설 수밖에 없다.
교회마저 외면하면 한국 역사는 끝장이다. 목사들이 교회 밖으로 나와 ‘중립은 없다’ 하며 몸값을 쑥쑥 올려야 한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