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발가락이 없는 아이가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여린 피부가 슬쳐서 뛰기는커녕 걷는 것도 느릿느릿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아이를 친구들은 느림보라고 놀리며 장난을 퍼붓습니다. 결국 여덟 살 남자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엄마는 “느리게 천천히 걸으니까 남들이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을 넌 많이 봤겠지? 오늘은 무얼 보고 왔니?” 라며 환하게 웃어줍니다.
아이는 매일 천천히 걸으면서 길가의 꽃들과 하늘, 논밭을 바라보며 엄마에게 줄 선물을 찾아 돌아오곤 합니다.
하루하루 아이에게 꽃이며 열매며, 또는 보고 들은 이야기를 선물처럼 받은 엄마는 “이렇게 사람들이 지나치는 것들을 다 눈에 담고 왔구나. 넌 정말 행운이 있는 아이야.”
이 한마디가 아이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을지 굳이 결말을 얘기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아이에겐 친구도 별로 없었습니다. 느리다고 구박받고 놀림만 받았으니 친구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친구들 사이에 인정을 받게 된 일이 생겼습니다. 천천히 걷다가 눈에 띈 사슴벌레를 발견하곤 친구들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이 일로 또래 아이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분명 더 많은 친구들과 즐겁게 놀았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얼마 전에 읽었던 쓰가루 백년 식당이라는 소설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입니다.
세 아이를 키우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자꾸만 힘들고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들어가고 공부를 시작하는 나이가 되다보니 좀 더 잘 했으면 좋겠고, 숙제도 좀 빨리 했으면 좋겠고, 자기 방 정리도 척척 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동안 제 눈에 담았던 것은 아이의 탁월함, 이 아이만의 장점이 아니라 부족하고 채워야할 것들뿐이었다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필요한 것은 국,영,수,사,과 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받고 지지 받고 있다는 믿음을 마음속에 가지고 크는 아이들의 미래는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쭉쭉 뻗어나가는 나무가 될 터인데, 그리 잘 나지도 못한 부모의 틀로 미리 가지치기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큰 아이는 하루의 대부분을 이어폰끼고 음악을 듣습니다. 제일 즐겁대나 어쩐대나~ 둘째 아들은 방에 들어가서 레고 조립을 하느라 밥도 거르기 일쑤고, 도통 움직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염둥이 막내딸은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얼굴 보기가 힘들고, 해질녁까지 돌아오지 않아 야단도 맞습니다.
이럴 때 엄마인 제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음악만 듣다가 공부는 언제 할래? 이제 중딩인데.... 방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운동도 좀 해라” “딸내미가 그렇게 나가서만 놀려고 하냐, 좀 차분히 집에도 있어야지...”
예전의 제 모습은 아이가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그 일 때문에 하지 못하는 다른 일들을 걱정하고, 아이가 모든 것을 다 해내길 바랬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늘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판단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것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부족한 것을 계속 지적하는 것과 아이의 단점조차 장점으로 바꿔주는 말들을 하면서 격려하는 것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에 아이들이 밝아지고 더 잘될 것인지는 현명한 부모라면 저보다 빨리 판단하시겠지요.
세상에 별의별 다양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듯이 아이들도 제각각 잘하는 것, 탁월한 것들이 존재합니다.
일찌감치 재능을 꽃피우는 아이도 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원석으로 숨겨져 있는 아이도 있을 겁니다. 아이들이 마음속에 숨은 원석을 찾아내고 잘 세공하여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만들기 위해서 부모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부모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은 잠시 내려놓고, 순수한 존재로서 아이를 바라보면 그 안에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원석들이 보이지 않을까요?
아이가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워하는 것들 속에서도 장점을 발견하고 이야기 해주는 소설 속 주인공 엄마를 닮고 싶습니다.
/서소영= 약사(이서면 하나로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