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익(徐益:1542~1587)의 행장에 “…정여립 인물됨을 상소하니 임금은 살피지 않고 물리쳤으며, 삼사 역시 여립을 옹호 도리어 서익을 공격했다. 왕은 여립을 싫어하면서도 용서하니 공은 사직하고 물러났다. 날로 어그러지는 세상 꼴을 보며 몸담은 조정 일 괴롭고 답답해 양호 간을 떠돌다 마침 ‘고산(高山)’ 산수가 그윽하고 아름다워 한 정자를 지어 좌우에 대나무를 심고, ‘만죽정(萬竹亭)’이라 하며 선비를 위하니 많은 사람 찾아들어 배웠다”(…?進 上優批不省 於是三司護汝立 攻公甚力 上雖斥汝立爲邢恕 而公亦罷歸 見時象日乖 ??不樂在朝 棲棲兩湖間 愛高山山水幽? 置一亭 種竹左右 名之曰萬竹亭 爲士者 多就學焉). 이 글 앞뒤를 더 읽으면 속 시원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지금 고산 사람이나 옛날 선비들 세심정(洗心亭)과 혼동한다. ‘만죽정’과 ‘세심정’이 다르다는 우천(牛泉) 이약수(李若水:1486~1531) ‘춘제세심정(椿題洗心亭)’ 시가《우천유고집》에 있다.
이약수는 광주이씨 고산 입향조 이성(李誠:1517년생)의 아버지다. 이약수는 1531년에 죽었고 서익은 11년 후 1542년에 낳았으니 이약수가 둘러보고 시를 읊은 ‘세심정’과 서익이 지었다는 ‘만죽정’은 각각 다른 건물임이 확실하다.
시제에서 ‘춘(椿)’은 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춘수(椿壽)라는 말이 있다. 목산 이기경(李基敬:1713~1787)의 세심정기(洗心亭記)가《목산고(木山藁)》430면에 있다.
‘옛 정자 세심정이 있었는데 언제 없어진지 모르고 근세에 쌍청헌 작은 집이 있었으니 이 역시 사라져 오직 터만 남았다(舊有亭 名曰洗心亭 而不知廢於何時 近歲有建小軒 扁以 雙淸者 未幾又毁 獨其址存焉)’ 쌍청(계)헌 자리가 곧 세심정 터라는 것이다.
추정되는 자리와 기둥 구멍이 있으니 그 고증 어렵지 않다. 나온 김에 덧붙일 말 있다. 수십 년 전 망북대가 없어져 아쉬웠는데 마침 작년 군에서 구명산 꼭대기에 정자를 세웠다.
구금회를 촉구한 결과 군수 만나 ‘망북대(望北臺) 현판’ 다는 문제를 해결했다. ‘옛날 우암 글씨로 할 게냐? 신인 작품을 걸 것이냐?’ 이는 오로지 극창 직손들 뜻에 달렸다. 구금회는 한 건 해냈는데 수 많은 후손들 심상은 아직 모르겠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