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 대체로 △감옥[유치장]에 갇혀 있던 자 △직접 싸우던 군경과 전투대원 △유탄에 맞거나 피난길 폭격에 애먼 사람 귀한 목숨 많이 빼앗겼다.
공주 어느 골짜기에서 유골 수습하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성격은 다르지만 느낀바 있어 교수들에게 진언한다.
1950년 초 고산읍내가 여러 번 습격을 받아 사람이 죽고 면사무소 등 집이 불에 탔다. 당시 면역소 거리엔 수십 개의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다.
수복 후 이 땅이 개인에게 넘어가자 즐비했던 비석군(群)이 자포골 현 완주문화원 건너편 언덕바지로 옮겨졌으나 관리가 허술해 주변에 집을 짓고 예수병원분원이 서자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공무원, 주민, 유림은 눈뜨고 당했으니 피차간 무지의 소치이다.
비석 무거워 멀리 간 게 아니니 땅을 파보면 분명히 나올 것이다. 문화관광과나 문화재청 착안을 기다림도 좋지만 순발력 넘치는 사학과 교수와 학생들의 환심이 기대된다.
우석, 전주, 원광, 전북, 군산대학교에 박물관이 있고 저명한 조법종, 홍성덕, 송화섭, 하태규 교수와 나종우 전주문화원장이 작심만하면 발굴이야 어렵지 않다.
이 일이 성사되면 △무지한 민중의 깨우침이 되고 △1000년 고산 역사 일부의 소생이며 △일자리 창출에 금석문의 획득이다.
묻힌 비석 내용이 궁금하지 않나? 진흥왕순수비와 광개토대왕비를 중시하는 교수들의 집념을 믿고 이 정보를 준다.
한 스님의 노력으로 가 일본에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묻힌 비석 기억하는 노인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한다.
고산 옛집 겨우 세 채 문묘와 정안당 고산양로당 뿐이나 주민들 설명이 시원치 않다. 이런 수준이니 시군통합 이야기가 나온다.
고산현청 터는 개인에게 넘어갔고 그 복판에 도로 계획선이 그어졌다.
폭폭한 일이다. 비석 발굴 현장에 초·중·고생을 입회시켜 조상의 무지를 깨우쳐 주자. 학교장 몫 산 역사 교육이다.
고산 사람은 왜 잊고, 잃고, 버리고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새 역사로 피어나는 익산왕궁탑 주변과 미륵사지 정화사업이 무척 부럽다. 젊은 층이 울분을 터뜨려 쪼개진 민심을 융합시켜야 한다.
하늘 눈 감기고 저지르는 죄를 반성해야 걸맞는 대접을 받는다. 장풍만리통(長風萬里通)이라 했으니 까막눈을 열어 주자.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