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하룻날 아침 목욕하고 이 글을 쓴다. 항렬로는 질부이지만 93세 원로이시니 누군가 그 삶을 물어봐야할 때이기에 길라잡이 역할이라 생각하며 붓을 들었다. 1945년 해방! 박윤순은 스물네 살 남편 이진남은 10월에 돈 벌겠다며 일본에 갔다. 당사자가 없어 자세한 사정 확인할 길은 없다. 남편 떠난 농촌에서 시부모 모시고 1남 1녀 양육한 여인이 누군가. 청상(靑孀)도, 소사(召史)도, 과부(寡婦)도 아닌 오직 전주 서쪽 ‘골안육리’ 새댁일 뿐이다. 사신 이야기 본인이 쓰거나 아들 국순(國淳:1943년생)이 피눈물로 적어야 의당 실감나련만 양인은 선뜻 움직이지 않는다. 마전 재실촌 입구 여각(閭閣) 정씨부인(1822~1905)은 혼자 50년을 사셨고, 박윤순 여사는 70년 독수공방이다. 남편 나간 외며느리 박윤순은 시아버님 대규(1904~1971) 시어머니(연안이씨:1901~1967)를 지성껏 모신 만고효부이다. 낮에는 과수원 밖 전답에서 일했고 걸어 10리 남문시장에 다녔다. 외아들 전주고등학교 보낸 기쁨이야 일시 대단했지만 1960~80년대 공직생활 하던 아들 걱정은 그칠 날이 없었다. 국순 혈혈단신 살아가는 방도에서 남을 이기는 길 하나는 오직 ‘술’이었다는 슬픈 일화가 있다. 술을 말려야 하나 권해야 하나 날마다 기다리는 마음 가지고 살았다. 외아들 70 넘어 사모의 정을 모아 10대조모 의성김씨(1696~1760:필 부인) 후손들이 홀로 사신 어머님 오래오래 기억할 묘안을 구상 중이란다. 우리는 이 아침 탄생을 말하며 죽음도 토론한다. 30청춘-50장년-70노년-90극로 연륜 마디마디 굽이굽이마다 돌아보면 눈물 고인 자국뿐이다. 듣고 싶어 묻는 말에 대답을 접는다. ‘그냥 살았다’는 것이다. ‘그냥’이 더 궁금하다. 성현 말씀에 ‘과부 돌보라’ 했는데 이 세상 이랬다는 미담 들어본 적 없다. 세인은 이런 일을 두고 ‘헛 돈다’고 한다. 명리에 밝은 종중은 박윤순 효열부에게 살아생전 화환 하나 목에 걸어드리면 부고 받고 3단 꽃사다리 열 개 보내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매란국죽’ 칭찬 말고, 내 겉의 모래, 자갈, 석탄, 바위 깨물며 사신 여인에게 주목해야 민주주의 인본주의 아니겠나. 송구영신 새아침의 화두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10: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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