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마세요.’ 어느 요양병원 휴게실 장기판에서 발견한 글귀다. 다른 곳도 아닌 요양병원에서 그것도 오락을 하다말고 왜 싸운단 말인가? 처음에는 우습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한 군데도 아니고 사방에 선명하게 써놓은 글을 보며 제법 심각한 상황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한편 화가 잔뜩 나 있을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앉은 채로 다투다가 급기야 일어서서 멱살을 잡고 그렇게 몸싸움을 하는 것이겠지. 장기판이 날아다니는 경우도 있을 거야. 주변에서는 말리느라고 진땀을 빼겠지. 졸지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을 휴게실이 자꾸 오버랩 되었다. 어이구~ 여기서나 좀 편하게 지내시지 웬 싸움을 그렇게……? 장기판 가장자리를 바라보다 글귀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싸우지 마세요.’ 서로 위하면서 지내세요. 외롭잖아요. 그런 당부겠지.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반복해서 읽다보니 이 글이 ‘어르신들, 어서 장기판 앞으로 오세요.’ 라는 주문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다시 장기를 두지 못하게 할 것이라면 판을 치워버리든가 다른 기구로 대체 하든가 했을 것 아닌가. 다시 앉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이런 당부가 필요한 것이겠지. 어르신들이 장기판 앞에서 싸우고 다시 앉고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활 일부일 터. 반복되는 싸움은 정녕 서로의 기운을 돋게 하는 촉매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절찬리에 상영한 라는 인도영화가 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일가족이 동물을 배에 싣고 캐나다에 이민을 가는데, 도중에 배가 난파된다. 모두 바다에 수장되고 한 청년(‘파이’)과 호랑이만 구명보트에 남게 된다. 이 청년은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잔뜩 긴장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는데, 그 노력으로 무사히 항해를 마쳤다는 이야기다. 장기 두는 기술, 싸우는 기술, 피하는 기술, 내 편 만드는 기술……. 요양병원에서도 어르신들은 이렇게 여러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마치 호랑이와 맞선 청년처럼 말이다. 어느 하나만 소홀해도 나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장기판에 앉는 때만 긴장해서는 안 되고 평소에도 적당히 기를 모으고 있어야 몸도 마음도 평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생활 속에서 자존감도 고양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무던히도 많이 싸우며 자랐다. 격렬한 싸움도 있었는데, 그 때 나의 일관된 바람은 상대가 끝까지 대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생하자는 뜻 아니었을까. 어르신들 세계도 그런 것 아닌지 싶다. 기운이 떨어지면 장군 멍군을 부르기조차 힘들 것 이고 보면 말이다. 요양병원까지 와서 왜 싸우실까 하고 의아해했던 내게 장기판의 글은 깨달음의 기회를 주었다. 늙어서도 기가 펄펄 살아 있어야 한다는……. “요양병원에서 장기 두는 어르신들, 화나면 싸우세요. 기운 발산하셔야죠. 그 대신 부서지지 않는 선에서 싸우셔야 합니다.” 다음에 갈 때는 장기 한 수 청해서 두고 와야겠다. 물려달라고 하시면 절대 안 물려 줄 것이다. /이승수= 완주우체국장
최종편집: 2025-06-24 09: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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