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들에게 “얘야! 니 새 처는 밥하며, 빨래하며, 길가며, 일하며 밤낮 없이 울기만 하는 디 웬일이냐?”
아들 대답이 “떼어 놓은 새끼와 시아버지 생각 때문이라 그런가 봐요.”
어머니는 “그럼 왜 가만히 있어! 얼른 가 데려와야지. 쩌쩌쩌쩌…” 뒤를 몰아세운다.
아들은 아내 사정을 아는지라 어머니 말씀대로 처의 본가에 달려가 자초지종 말을 하고 노인과 어린애를 데려왔다.
1920년대 대아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마을이 물에 잠기자 여기 살던 가난한 서씨가 화산면 종리 ‘뒤두골[굴뒷골]’ 산막에 이사했으나 젊은 대주 병으로 곧 죽자 젊은 과부, 갓난애, 늙은 홀시아버지는 타관 객지 산골짝 외딴집에서 서리 맞은 호박잎 신세가 됐다.
이를 안 아랫마을 장정들이 겨울밤 들이닥쳐 다짜고짜로 아낙네를 보자기에 싸 짊어지고 갔다.
지금 말로 무슨 인권! 결국 홀아비 박씨와 짝이 됐다.
부인을 맞은 박씨 집안에서 이부자식과 늙은 홀시아버지까지 받아들여 한 식구로 삼았다.
여인은 딸 아들 낳으며 독실하게 살았지만 가난은 여전해 맏딸을 시집보낼 때 신랑은 이불 껍데기를 신부 측은 솜을 내어 겨우 이불 한 채 만든 정도이었다.
이렇게 출가한 맏딸 내외는 서울·성남에서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고, 둘째 딸 은 기도에 열심이더니 남편 이 모 목사요, 외손자 둘도 교역자란다.
젊은 과부의 눈물과 그 딱한 사정을 외면치 않은 박씨 집안의 온정이 밑바닥 인생의 보호막이 된 소설 같은 이야기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80된 큰 사위 고향을 자주 찾아 친구 대접 잘 하면서도 아들 얘기는 좀처럼 하지 않는데 알고 보니 독일 ‘도르트몬트 대학’ 토목공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 삼성중공업 조선해양사업부 교량 설계 전문인이란다.
이는 보쌈 당한 여인의 외손자이다. 이래서 여인들은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보다.
기회가 오면 안개비 자욱한 툇마루에서 국밥 한 그릇 대접하고 싶다.
어머니 소리 한 번 못 들을 미혼녀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