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장이란 쉬운 말로 ‘암장’을 말하며 남몰래 지낸 장사이다. 즉 저 잘되려고(?) 타인의 묘 곁에 백골을 묻는 불법 행위이다.
전에는 투장이 흔해 산송으로 이어져 죽자 살자 싸웠다. 김경숙 조선대학교 교수는 이런 이야기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산면 하삼기 이 아무개가 자전거를 타고 어우리 근처를 지나는데 ‘무지개’ 끝이 자기 종산에 꽂혀 있지 않은가. 이상하게 여기고 쫓아가 보니 아무래도 투장이 든 것 같아 수소문 한 후 그 자리를 파 두개골을 꺼내 소향리 투장자에게 갖다 주었단다.
며칠 후 이웃마을 오씨가 찾아와 “얼마 전 두개골이 실은 자기 아버지 것”이라며 암장한 사실을 실토해 문제가 어려워졌으나 3인은 묘를 파 백골을 주고받는 선에서 마무리 했다.
식자들은 그 혈이 욕심낼만한 아름다운 ‘무지개’ 명당이 아니라 『모두 아는 게 없는(無知皆:무지개)’』자리라며 비웃었다. 지금은 인식이 바뀌고 명당 욕심이 바로잡혀 이곳저곳의 무덤을 파 가족공동묘지를 만들거나 아예 합봉하는가 하면 ‘화장’과 ‘수목장’을 선호한다.
납골당 봉안을 “무지개[無地開:땅을 열지 않으므로] 명당”이란 신조어 극히 가당한 말이다.
숭조 사상이 투철하다(?)는 노인들 족보를 꾸미며 ‘왜 선대 묘가 없느냐?’ 묻는데 답은 이러하다.
▲고려시대는 남자가 여자 집에 장가들었고 죽으면 처가 산에 묻히니 할아버지 묘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일관 되게 알 수 없기 마련이며 ▲당시는 8촌까지만 따졌으니 공동 조상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 몰라도 거북할 게 없었던 것이다.
전주이씨 시조 한(翰)이하 21세 여(輿)까지 묘를 모르며, 22세(문정) 무덤이 완주군 이서면에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춰 실전이 수치 아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묘와 연관 지으면 좀 무리이다.
묫자리 산세 즉 ‘좌청룡 우백호’를 ‘좌(左)택시, 우(右)버스’ 신명당론 교통 편익이 등장하여 선택이 수월해졌다.
다만 영혼과 인간이 소통하는 자리가 바로 묘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고산 8대명당의 으뜸이라는 전주류씨 시조 류습 묘도 얼마 전 전주시 인후동 시사재 근처로 옮겼다. 잊지 않으면 명당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