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그늘 뒤로 자리 잡은 보광사(普光寺)와 보광사지. 이 보광사지는 구이면 평촌리 상하보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보광사는 백제 때 창건된 이래 화엄도량으로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고 한다.
그 뒤 충숙왕 복위 3년인 1343년에 승려 중향(中向)이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중향 스님은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절이 황폐해진 것을 걱정하고 중흥 시킬 뜻을 품고 보광사를 중건하기 위해 시주를 받기 시작했다.
중향 스님이 시주를 받아 보광사 중건에 사용된 금액은 천으로는 2만5천냥, 황금을 녹여서 그 색상을 새롭게 한 것이 15근, 백금으로 기명을 장식한 것이 39근이었다.
새롭게 중건 된 보광사에 대해 ‘중흥 대화엄 보광사 기(重興大華嚴普光寺記)’에는 “불전·승당·손님 방장실(丈室)·해장(海欌)과 향적(香積)들이 위광(威光, 성스러운 빛)스럽고 조음(潮音, 바다물결의 소리, 파도치는 소리) 같으며, 복도와 행랑을 좌우에 만들고 담장을 둘렀고 문과 뜰 섬돌이 오르고 내리고 도는 데에 있어서는 예전 규모보다 더하고 감한 것이 없이 모두 다 알맞게 됐다”고 쓰여 있다.
또 “정축년 봄에 시작해 계미년 겨울에 준공돼 그 달에 인연 있는 이들을 널리 청해 화엄법회를 크게 열어 낙성식을 하니 모인 대중이 3천이고, 날 수로는 50일 이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100여칸의 불전과 승당, 객실, 방장실, 향적전, 회랑, 산문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던 보광사는 조선시대에 폐허됐다.
이렇게 번영했던 절이 폐허됐는지는 문헌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보광사에 대한 문헌을 조선시대 초 문인인 서거정이 엮은 시집의 동문선(東文選)과 신동국여지승람 전주부 불우(佛宇)편 등에서 볼 수 있다.
상하보 마을 주민들은 현재 보광사에서 나온 돌들과 연화불좌대석(蓮花佛座臺石) 등을 이용해 누석단을 조영(造營)해 놓고, 그 안에 작은 석불을 안치했다.
또 누석단 앞에는 최근에 큰물이 졌을 때 출토된 석등대석(石燈臺石)을 놓았다.
연화불좌대석은 거대한 복연 8잎을 새겼으며, 위에는 직사각형의 좌대가 마련됐다.
석등대좌는 거대한 자연석을 윗부분만 다듬어서 사각형의 기단을 조영하고 높이 31cm 정도의 원추대의 대좌를 깔았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주위에 8잎의 연화문을 복엽으로 조각했고 상단 중앙에는 둥근 홈을 파 놓았다.
현재 보광사지에 대해서는 젊은 상하보 마을 주민들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나이가 연로하신 어르신들은 보광사지에 대해 잘 알고 계셨는데 몇 해전 마을을 들렀을 때 한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다. 어르신이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92살이 되신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누석단이 위치한 곳에 아래에서 위까지 모두 똑같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평한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탑의 가장 아랫부분은 구멍이 뚤려 있어서 그 안을 볼 수 있었고, 탑 안에는 귀 하나가 떨어진 큰 돌부처가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8살이 되던 해에 일본사람들은 이 5층 석탑을 가져갔다.
그 때 당시 일본인은 산에서 소나무를 잘라서 탑 옆에 지지대를 세운 후 석탑의 윗부분부터 해체하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탑의 윗부분을 해체했을 때 옥으로 된 항아리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은 마을 사람들이 그 것을 보지 못하도록 곧바로 천으로 감싸고 어디론가 가져갔다.
할아버지는 그 항아리 안에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맑은 빛이 눈이 부신 참 예쁜 항아리 였다”고 말했다.
일본인이 보광사의 석탑을 가져간 후 마을에는 기인한 일이 있었다.
하루는 마을 사람의 꿈에 석탑이 보였고, 그 석탑 안에서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집이 헐렸다고 한탄하며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후 마을에는 사람이 없는 집은 이유 없이 허물어 졌다. 이유 없이 허물어 진 집은 무려 13채에 달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 나이가 17살 되던 해에 보광사에서 나온 돌을 모아서 누석단을 쌓았고 그 안에 작은 돌부처 하나를 모셨다. 누석단을 쌓은 후에는 마을의 빈집이 허물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누석단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석불은 현재도 마을 주민의 신앙대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누석단 바로 뒤에 사는 할머니는 이 석단을 관리하며, 해마다 석가탄신일이나 칠월칠석날 같이 불교의 기념일에 초를 켜고 정성스럽게 공양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백제시대 때 창건된 화엄도량인 보광사는 시간이란 세월 속에 그 자리를 내어 주었지만 아직도 마을 주변에는 보광사의 것으로 보이는 고려 토기편과 기와편 등이 출토되고 있어 그 옛날 화려했던 보광사를 짐작할 수는 있다.
특히 상하보 마을 주민들은 보광사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해도 일본인들에 빼앗긴 돌탑과 옥으로 만들어진 항아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주민 이씨는 “많은 주민들은 일본인들이 가져간 석탑과 옥 항아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