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만 되면 나는 이상한 나라 엘리스에서 온갖 기괴한 모험을 벌이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마음이 조급해진다.
말하자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면 약간의 준비작업, 그러니까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과 기도가 필요할 것 같은 기분과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언 듯 ‘이상한 나라 엘리스’는 내 직장이 되고 ‘현실’은 내 가정이 될 듯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자신의 생각에 의구심이 들었다.
주말이면 거의 가족과 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둔 다둥이 아빠인데도 평일은 병원장으로 그리고 의사로서 수술이며 각종 약속과 모임, 그리고 취미 활동 등으로 육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토요일 늦은 오후에 처갓집 휴가에 먼저 가있던 가족들과 뒤늦게 상봉하여 시간을 보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일요일 오후에 돌아와 짐을 풀었다. 아이들 셋을 집에 두고 마트에 가서 장을 같이 보았다. 돌아오니 저녁 9시 반. 정리하고 아이들 씻기고 밥을 먹으니 10시 반. 마지막으로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 싶어 눈치보며 내 서재로 올라가려는데 “여보 아이들 밥좀 먹여주시면 안돼요? 저도 밥좀 먹게요” 한다.
그러기를 30분 하고 나니 11시가 막 넘어선다. 슬슬 짜증이 나고 조급해졌다.
얼른 밥을 다 먹이고 “나 차라리 병원에 갈게. 저번 주에도 이야기 했잖아. 좋게 같이 장까지 보고서는 한다는 이야기가 미안한데... 나 일요일 저녁 7시 정도 부터는 좀 시간을 돌라고 했잖아. 이렇게 해서 주말 저녁에 아무것도 못하고 지쳐 잠들어 버리면 정리가 안되어 내일 환자 볼 때 너무 너무 힘들어”
그리고는 차를 몰고 횡하니 나가서는 집 앞 공터에서 씩씩거렸다.
나가서는 ‘병원장’이지만 들어와서는 아내에게는 그저 ‘남편’일 수 밖에는 없는가보다 하면서...
다음날 직원 조회시간에 직원들에 어제 마음에 일었던 상념과 경험을 이야기하며 “내게 의사라는 직업은 환자를 보기 전 먼저 자신을 안정시키고 평정한 마음상태에서 공부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나와는 반대로 이상한 나라 엘리스가 ‘직장’ 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지 않나요?”
하여튼 어제 밤 12시가 다 되어 내 방으로 올라왔다. 내게 책 읽으며 조용히 사색할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은 아내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궁시렁 거리며 침대에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마음을 잡아 준 문구가 있었다.
‘똥을 누면 똥이 도’ = 옛 선사들은 밥 먹고 똥 싸는 거슬 도라 했다. / 그 뜻은 범부 중생은 밥을 먹으면서도 오만 생각을 하고 똥을 누면서도 오만 생각을 한다. / 그래서 중생이고 도인은 밥을 먹으면 오로지 밥만 먹고 똥을 누면 오로지 똥만 눈다. / 그래서 도인은 밥을 먹으면 밥이 도요, 똥을 누면 똥이 도인 것이다. / 이 도리를 알면 매 순간 도 아닌 것이 없다.
직원들에게도 낭독한다. 내 맘속에서 아내에게는 ‘남편’이라기 보다는 ‘병원장’으로 또는 ‘의사’로서 내 상을 강요한 꼴이 되었다.
아내에게 내가 ‘남편’이기는 하지만 ‘글 읽는 선비로 또는 학자’로, 그리고 직원들에게 설명했던 대로 의사란 이런 마음이어야 한다는 어쩌면 샤머니즘 같은 애매한 종교관(?) 같은 것을 이해해 주고 받들어 주기를 바라는 욕심스런 마음이 항상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말하자면 내 편의대로 하고 싶은 욕망에 밥먹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똥누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며 항상 불평을 했던 것이다.
‘가정’이 이상한 나라 엘리스인지 ‘직장’이 이상한 나라 엘리스 인지 그런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루 하루 매 순간 그 역할에 충실히 집중할 때 자유롭고 만족과 행복이 찾아 오는 것 같다.
이런 말도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잇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며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김재엽 =전주우리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