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완주군에는 일제의 야욕에 맞서 싸운 중요한 두곳의 전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소양면에 위치한 웅치전적지와 운주면에 위치한 이치전적지다. 이치전적지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맞아 처음으로 승리를 한 전적지로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웅치전적지는 전주성을 넘보는 왜적의 야욕에 맞서 목숨 바친 의병들의 넋이 기린 곳이다. 지난 15일은 제68주년을 맞은 광복절이었다. 광복절을 맞아 소양면 웅치전적지와 운주면 이치전적지를 소개해 본다. =========================================================== ■왜구의 야욕에 맞서 목숨 바친 의병들 넋이 기린 웅치전적지(熊峙戰蹟地) =========================================================== 우리조상들이 일본으로부터 7년 동안 전 국토를 유린당하며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던 임진년의 왜란은 아직도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세월이 지나도 우리들 마음속 한켠에 아픈 과거로 자리하고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숭고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이름 모를 의병장수들은 ‘이 한목숨 바쳐 내 나라, 내 가족, 내 땅을 지켰으니.’ 그 걸로 족했을 것이다. 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762m로 사람들은 부처산 또는 만덕산 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만덕산의 봉우리인 웅치재(곰티재)에 임진왜란 당시 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왜군에 맞서 싸운 관군과 의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웅치전적지가 위치해 있다. 웅치전투는 비록 일본에게 패한 전투이기는 하지만 이치전투와 같이 일본의 전주성 침략 야욕을 무너트린 중요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전국토를 일본에게 내주었지만 유일하게 일본이 넘볼 수 없었던 곳이 바로 전라도 지방이었다. 전라도 지방은 당시 조선의 중요한 곡창지대 중 하나였고 왜군은 싸움에 필수 요소인 군량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라도 전라도 지방을 수중에 넣어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전주성을 있게 한 역사 중에 바로 웅치(熊峙, 곰티) 전투가 자리하고 있다. 당시 전라도 공략 책임자인 왜군장수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가 지휘하는 왜군은 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에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전진 배치된 의병장 황박(黃璞)이 1진으로 선봉에 서고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이 2진을 맡았으며,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이 3진에 배치되어 침공해 오는 일본군을 맞아 웅치의 지형을 이용해 적을 격파하기 위한 진을 쳤다. 1592년(선조 25) 7월 7일 수천 적군을 맞아 첫날 분전 끝에 격퇴했다. 다음날인 8일 아침 왜군은 전병력과 화력(火力)을 동원한 전면공격을 해와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조선군은 제1선, 제2선이 무너지고 마지막 제3선도 정담의 전사로 무너졌다. 싸움이 끝난 뒤 왜군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성에 깊이 탄복해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표목(標木)을 세우고 “조선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써 놓았다고 한다. 왜군은 싸움의 승리로 전주로 들어갈 길을 뚫었으나, 조선군의 기개에 눌려 전주성 밖에 머물다가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 10일에는 이곳 웅치전적지에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직접 나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연고 없이 죽은 이들의 넋을 달래는 날이다. ============================================== ■임진왜란 당시 왜구와 맞서 첫 승리를 장식한 이치전적지 ============================================== 이치(梨峙)전적지는 지난 1976년 4월 전라북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치(배티재)는 대둔산 기슭인 운주와 진산 사이의 고개로 완주군과 금산군의 경계이며,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이치 전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민공 황진 장군의 승전을 찬양하는 이치 대첩비가 고개 위에 당당하게 서있다. 왜구는 이치 싸움을 조선 3대전의 하나로 꼽는다. 그 이유는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처음으로 패배한 전투이며, 일본이 구상했던 조선침공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왜군은 금산에서 웅치 방어선을 뚫고 호남의 수도인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침입해왔다. 이에 전라도절제사(都癤制使) 권율은 금산성을 나와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과 더불어 향병(鄕兵) 1천500명을 이끌고 그 길목인 이치에서 적을 기다렸다. 방어시설로는 목책(木柵)을 쌓았고, 거마(拒馬), 녹채(鹿砦), 함정, 납가새, 철질려(鐵疾藜 : 마름쇠) 등을 갖추었다. 전투는 1592년 7월 8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해가 질 무렵까지 일진일퇴의 혈전을 거듭한 이날 전투결과는 왜군이 참패를 당하고 퇴각하게 되었다. 황진장군은 휘하의 장수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한 때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마침내 적을 대파하니 적의 시체가 수십리에 즐비했으며, 아군의 피해는 경미했다고 한다. 아군을 압도하는 병력과 조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적을 대항해 승리로 이끈 바탕에는 장수들의 성실한 지휘와 향토 병들의 불굴의 투지, 험한 지세를 이용한 철저한 대비, 차질 없이 진행된 군수품 보급에 있었다. 이치싸움은 같은 날 벌어진 웅치싸움과 더불어 왜적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라도 땅을 범하지 못하게 한데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싸움의 승리로 인해 전주성이 안전하게 되었고, 정유재란(1597) 때까지 7년 동안 군량보급과 병력보충에 크게 공헌했으며, 전라감사 이광이 지휘한 용인패전(龍仁敗戰)으로 침체한 군사들의 사기를 회복했다. 권율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여세를 몰아 전라장병 8천명을 이끌고 북상해 행주대첩의 주력이 되었다. 이치싸움은 웅치싸움과 더불어 행주대첩을 가져온 바탕인 동시에, 전라장병들 자체로 향토를 방어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꼽는다. 이치싸움에서 참패한 왜군은 전라도 방면의 침공을 단념하게 되었다.
최종편집: 2025-08-14 03: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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