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에는 옛날 30여 군데의 성이 있었다. 이는 ‘왜구 피해를 덜어보자’는 시설로 봐야 한다. 고려 말 최무선이 화포를 만들어 진포에서 박살냈다는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어쩌다 걸려들어 혼쭐을 낸 것에 불과하다. 바닷가는 다반사이고 우리고장 화산까지도 그들의 발길이 닿았다. 세종 초 대마도정벌은 영원한 ‘정복(征服)’이었어야 했는데 일시적 ‘정벌’로 끝이나 이게 한이다. 1597년 8월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전라도가 이렇게 짓밟혔다. 왜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는 주적이었고, 그 반면 ▲진우충(陳愚衷) ▲양원(楊元) 등 명나라 원군 장수 역시 때로는 미운 짓을 해 부적(副敵) 소리를 듣는다. △남원 전투에서 양편 5천명이 죽었고 관가·사가 모두 불에 탔다. △전주를 지키던 진우충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이 들이닥쳐 분탕훼리(焚蕩毁吏)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양 운봉 장수 진안을 거쳐 전주를 향해 올 때 남긴 건 하나도 없었다(無不殘滅全). △이들은 양정포(良正浦:용진면 양전)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모든 장수가 모여 양호(兩湖)간의 물길을 끊자는 작전회의를 마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는 경기로,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남원으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순창 담양 등 7개 읍을 누비며 만나는 사람마다 코를 베고 마을을 태웠다. 남원 함락에 전주이북이 와해되자 서울 사람이 흩어지고, 조신(朝臣)들은 피난책을 내어놓았다《조선세기》. 이렇게 당하고도 우리는 멀뚱멀뚱하지 않는가. 젊은 하시모토 도루[橋下(本)徹] ‘근본이 틀렸으니 다리 아래에 처박을’ 사람 없나. 내일이 광복절 왜구(倭寇)·왜란(倭亂)·왜정(倭政)를 기억하라.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09: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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