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구름위로 들어 올린 하늘이 무거워서인지 구름이 잿빛으로 번집니다.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은 날씨 때문인지 후텁지근합니다. 행복을 위해 계절에, 날씨에 내 자신의 기분을 맞추는 일에 꽤 익숙해 있지만 특히 여름을 겨울보다는 더 좋아합니다. 작렬하는 태양, 찌는 듯한 더위, 비바람, 먹구름, 장마 이런 일련의 것들이 뜨겁게 느끼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열망하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긴 인생 여정에서 제 나이가 이제 막 마흔을 넘긴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말에 ‘나이’라는 말은 ‘나 익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나’라고 하는 단어도 ‘날(日)’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니 우리 민족은 예부터 시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익는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발효 된다’는 것입니다. 곡물이 발효되면 알싸한 향기를 내며 술이 됩니다. 그리고 발효가 되면 보통 처음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됩니다. 콩나물을 길러 보셨나요? 콩이 발효가 되면 씨눈에서 영양 성분을 분해하여 성장에 필요한 성분을 만들어 뿌리를 내립니다. 말하자면 이것도 발효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발효는 항상 새로운 ‘창조’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또한 ‘발효’는 ‘부패’와는 다릅니다. 부패는 외부와 단절되고 차단되어 죽어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발효는 외부와 교통하며 상호작용을 전제 하므로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발효는 항상 주변과 ‘어울림’ 또는 ‘조화’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과일이 익는 것처럼, 음식이 익는 것처럼, 그리고 벼가 익어가며 고개를 숙여가는 것처럼 발효 내지는 익는다는 것은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성숙한다는 것이고 완성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유행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이란 말이 어쩌면 틀리기도 하고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그저 단순히 숫자가 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익어간다’는 것이라고 하면 저처럼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그 나이에 맞는 발효 향기와 부드러움, 친밀함이 우러나야 한다는 말이기도 할 테니까요. 역으로 그에 맞는 적당한 향이 없으면 나이를 헛먹었다고 할 일입니다. 흔히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되가는데 이 또한 ‘얼’이 ‘익다’ 라는 표현이라고 하니 더욱더 생각해 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근후 님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라는 책은 나이 듦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특히 나이를 먹어 갈수록 되도록 나이가 많이 잡수신 ‘어른’이 쓴 책에 더 손이 갑니다. 어쩌면 ‘나이 듦’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나 혼자 이룬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하셨는데 반항기를 넘어서 어른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나는 이제야 철이 드는가 싶습니다. 같은 작가라도 젊을 때 쓴 글보다 나이 들어 쓴 글이 그 문체가 더 알기 쉽고 평이하지만 여운이 남게 전달하는 간결한 매력이 있습니다. 전공의로 10년 이상을 진료해 온 척추 질환도 말하자면 대게는 나이 들며 진행하는 퇴행성 질환입니다. 막 전문의를 따서는 되도록 크고 위험한 수술을 잘 하면 좋은 줄 알았습니다. 모든 질환을 수술을 하면 다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모 대학병원에 계시는 제 스승님이 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척추 수술은 ‘art of philosophy’라고 하셨는데 말하자면 수술은 ‘어떻게 하는가’ 하는 ‘손 기술’의 문제가 아니고 이 환자를 수술을 정말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리고 수술을 하려면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경험이 나이 들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발효의 일종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년은 동력이 거의 없는 잔잔한 호수를 떠가는 나룻배이기 때문에 아주 평범한 곳에서도 평소에 보지 못했던 성스러움과 신비함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찾아낼 수 있다”는 책의 구절이 인상 깊게 다가옵니다. /김재엽 =전주우리병원 원장
최종편집: 2025-06-24 10: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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