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거의 자동차로 다니니 길가 시설물을 제대로 보기 어렵고, 운전자는 더더욱 힘이 든다. 17번국도 용진면사무소 앞에서 군청 쪽으로 400m 쯤 오면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여기서 ‘봉서로’로 갈려드는 3거리에 ‘녹동’ 버스 승강장이 있고 흔히 ‘상운리’라 부른다. 여러 개의 알림판과 비석이 있다.
‘봉서사(鳳捿寺)’ 안내 표지석 보다 훨씬 큰 ‘봉서재(鳳棲齋)’ 화강암 비석은 밀양박씨 규정공파에서 세운 것인데 해마다 정해진 세금을 낸다.
차지한 바닥이야 그리 넓지 않지만 어느 날 ‘나라 땅이니 철거하라’는 명령이 내렸고 깜짝 놀라 알아보니 국가하천 부지란다.
“오래 전 빈자리에 세웠노라”고 항변이야 했지만 분명히 남의 땅이었다. 결국 사정을 해 당국에서 지정한 자리로 옮겼고, 법에 따라 사용료를 꼬박꼬박 내는데 처음에는 야박하다 여겼으나 지금은 오히려 떳떳하다고 자랑한다.
재실 있고 돈 많아 표지석을 세웠으며 자손 역시 똑똑하여 철거명령 고약한 사건을 잘 풀어 다행이란다.
문중에서 낸 《봉서재도기(鳳棲齋時到記)》는 여러 사람에게 요긴한 책이다. 이런 일을 주관하고 처리 잘 하던 회장이 만인(晩忍) 박길춘(朴吉春)씨이다.
풍채 좋고 아호가 특이해 『늙을 만년 ‘늦게야 참나?’ 아니면 ‘늦게까지 참아 절대 화내지 않느냐?』고 물으면 빙그레 웃을 뿐 답이 없더니 작년 12월15일 송천동에 아들이을 연다는 초청장을 보냈다.
아버지 호 ‘만인’을 병원 이름에 쓴 가족이 기특하여 ‘사해중생만인신(四海衆生晩忍信)’을 써 보냈고 답신 있기를 바랐는데, 아차 연초 화답 아닌 부음이 들려왔다.
‘상락아정(常樂我淨-나 늘 깨끗이 즐겁게)’ 연하장 먹물 냄새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계사년 ‘좋은 봄 [길춘(吉春)]’을 미처 보지 못한 채 ‘만인’은 갔다. 봉서재에는 여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으나, 봉황새 깃든 자리 어디냐 물어도 선뜻 대답할 사람 드물어 무척 아쉽다. 오늘은 제헌절 ‘헌법’ 앞에 겸손하자.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