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면 월상리 시내 버스 종점에 가보자. 여러 그루의 나무와 고가(古家), 물, 바위, 돌이 향토사를 말해준다.
곰티(치)재는 잘 아나 ‘곰티마을’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월상리’가 바로 곰티마을이다. ‘곰티마을’ 괴목들을 안고 유추해 보면
▲곰티재는 마지막 마을이며 첫 마을이란 뜻도 있다
▲곰티재를 넘어 진안 쪽 첫 동네까지는 20여리 두 세 시간 걸리는 잿길이 아닌가
▲피곤한 몸 갈 길이 머니 여기서 자고 ‘내일 새벽 일찍 떠나자’며 쉬어 가던 마을이었다
▲그러다 보니 음식점과 잠잘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주객 간에 얘기가 있었고
▲나그네들 사이에 술잔이 오가다 투전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곰이 노닐 정도로 무서운 곰티재
▲큰 나무와 고인돌은 무사안일을 비는 대상이 되었다
▲당시 길손들 마음에 위로가 되었던 ‘만덕산(萬德山)’을 바라보며 아차 아쉬운 생각이 절로 난다.
1960년대의 모습 그대를 보존시켰더라면 보물(?)마을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개울에 손을 댔고 축대를 쌓았으며, 여러 채의 양옥이 들어섰다. 고가 역시 개축돼 원형이 드물다.
아스팔트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어디서 왔느냐’ 질문이 없다. 전주 풍남문 앞이나 오거리처럼. 다만 시내버스 기사가 귀한 손님이라 그런지 친절하다.
마을 이름 ‘월상리(月上里)’를 풀어 보면 『달[月] 위[上]마을』이다. 그런데 여기 ‘달’과 ‘다리’는 발음상 비슷하여 두루 쓰일 수 있다. 익산~장수고속도로가 나면서 산과 산 사이에 ‘다리[橋]’가 걸쳤고, 마을에서 보면 ‘위에 달’보다 ‘위에 다리’가 더 우뚝하다. 어! 이것 봐. ‘위에 다리?’
이미 예정됐던 일인 듯하다. 다만 선조들의 예지 ‘교상리[橋(다리)上里]’를 ‘월상리[月(달)上里]로 적었을 뿐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완주-전주통합문제에서 ‘무얼 남기고, 무엇이 바뀌나?’에는 정신이 없이 감정만 달아오른 싸움이 걱정이다. 본심을 갈아엎지 말고 향토사를 거울삼아라.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