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차편이 좋아 산간벽지도 금싸라기 땅값이다. 소양면 위봉마을도 예외가 아니다. 원주민은 싸게 팔고 떠났지만 새로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 부자이다.
원래 이곳은 ‘산성(山城)’으로 유명하다. 『고산현 남쪽 20리 전주와 경계했는데 돌로 쌓은 성 둘레가 5,097파(把:걸음), 높이는 여덟 자, 성안에 우물이 45곳, 못이 9개, 소금산[鹽山]이 하나 있었다고(在縣南 二十里 全州界, 石築 周五千九十七把, 高八尺, 內有井四十五, 池塘九, 鹽山一)』 《고산지》에 적혀있다.
바로 이곳으로 고산현청을 옮기려하자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당국자들은 ‘전주와 금산’ 사이에 현이 하나도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지론에 따라 옮기지를 안했다.
이런 이야기를 찾다보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기원(三奇院)’이 나오고, 그 자리가 어딘지 평생 궁금했는데 《반계수록보유 권지일》의 ‘군현제’편 「위봉산성」설명문이 속 시원하다. “옥포역을 봉림촌 관사로 옮겼다(玉包驛 移於鳳林村置館舍)”는 기사가 있지 않은가.
여기 ‘관사’가 바로 ‘삼기원’이라는 개연성이 뚜렷하다. ‘봉림’은 현재 낙안오씨 집성촌으로 상삼기마을과 하삼기마을 중간인데 전주에서 진산 금산 가는 길목 아주 좋은 자리이다.
원의 북동쪽에 ‘봉림교’가 있었다. 17번 국도를 내며 ‘봉림교’ 자리에 회사물(灰四物) 다리를 놓고 ‘삼기교(三奇橋)’라 했는데, 서기1990년대 우회도로를 내며 새로 가설한 다리를 ‘삼기신교(三奇新橋)’ 등 좋은 이름을 생각치 못하고, 있는 다리이름 그대로 ‘삼기교(三奇橋)’라 했으니 비난 받기 마땅하다.
수 백억원 공사 길 내고 다리 놓으며 볼멘소리를 듣는 당국자들 보기가 심히 안타깝다.
아호가 ‘봉림’인 오형선 선생이 봉림마을에 살았는데 한학에 밝았으나 일찍 죽어 세인들이 두고두고 아쉬워 한다.
유허비가 어려우면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야 하지 않을까.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