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완주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삼국시대 때에는 신라와 국경을 나란히 해 국운을 가름하기도 했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전주를 방어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기도 했다. 그 옛날 우리 고장에 살았던 조상들이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한 운주면 용계산성과 고중리산성. 이 두 산성은 백제의 관문으로 국운을 가름할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금은 산성 일부의 석축만이 남아서 백제인의 기백과 웅지를 전하고 있다. 이번 주말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가벼운 여행지로 추천한다. ================================= ■백제시대에 축조된 용계산성 ================================= 용계산성은 운주면 소재지에서 용계천을 따라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북쪽의 천등산(天燈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를 돌로 에워싼 형태를 띠고 있다. 이곳 용계산성에 가려면 운주면 게임과학고에서 고당리로 가는 오른쪽 길로 약 4km쯤 가면 용계산성이 위치한 천등산에 도착할 수 있다. 천등산은 후백제를 세우기 위해 견훤이 돌을 쌓고 전주성을 공략하려는데 연못 속에서 용이 닭 우는 소리를 내고 산신이 환한 빛을 발산, 앞길을 밝혀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천등산은 거대한 바위로 산이 이뤄졌고 계곡에는 절벽과 폭포, 바위사이를 뚫고 나오는 소나무들이 있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비경을 선사하는 명산이지만 대둔산의 그늘에 가려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산이기도 하다. 용계산성에 대한 문헌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고산고적조(高山古蹟條)와 문헌비고(文獻備考)의 고산조(高山條) 등에서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고산고적조 부분을 보면 “용계성은 용계천 위에 있는데 서쪽 10리 지점에는 숯고개(炭峴)가 있고 서북쪽으로는 연산현(蓮山縣)경계와 30리 떨어져 있으며, 석축의 둘레는 1천14척이요, 높이는 10척인데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의 둘레 1천14척을 포백척인 46.73cm로 환산하면 그 길이가 무려 474m나 된다. 또한 문헌비고에도 “고산 용계성은 용계천 위에 있는데 석축은 둘레가 101성4척이지만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백제가 둔치고 지키던 곳이라 한다”고 적혀있다. 용계산성은 서쪽 골짜기를 따라 ‘ㄷ’자형으로 축성한 포곡식(包谷式) 형태의 산성으로 험준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동쪽 벽은 능선을 따라 외벽만 쌓고, 다른 지역은 내외를 쌓은 협축(夾築.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것)으로 남쪽의 성벽높이는 내벽 2.2m, 외벽 4m, 폭 4.3m 내외였다. 성벽의 남동쪽 모서리에는 우루대(隅樓臺)가 돌출되어 있으며, 서쪽에서는 수구지가 확인되었고, 성의 내부에는 건물터가 자리하고 있는데 돗자리무늬가 찍힌 백제시대 기와 및 토기편들이 수습되기도 했다. 현재 이 산성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175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백제의 관문 고중리산성 ================================== 고중리산성은 운주면 고당리에 위치해 있는 백제시대의 옛 성이다. 이 산성은 용계산성에서 고당리 방향으로 5km가량을 더 가야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으로 인해 완벽한 산성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지만 군데군데 남아 있는 석축과 건물터 그리고 돌무더기를 보면 백제인들의 기백을 엿볼 수 있다. 고중리산성을 찾으려면 용계리에서 고당리 쪽으로 계곡을 따라 나있는 길을 약 3.2km 들어가면 삼거리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이곳에서 산북리쪽으로 약 1km를 들어가면 쑥고개가 나오는데 고중리 산성은 이 쑥고개에서 높이 약 150m가되는 산봉우리 위에 있다. 주민들은 이 산성이 위치한 산을 그냥 ‘성터 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는 산성이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고중리산성은 산봉우리 주위를 길게 돌로 쌓은 형태로, 규모는 약 350m로 그다지 크지 않으나 이곳에 오르면 배재, 싸리재는 물론 동쪽의 길목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백제의 역사를 가름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지였다. 이 산성에 대한 ‘고적조사자료’를 보면 고중리 산성은 농성이며, 석축으로 둘레 150칸 높이 6척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중리산성이 있는 곳은 현재 쑥고개라고 주민들이 부르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숯고개’라는 발음을 강하게 해서 나타난 명칭으로 보인다. 숯고개를 한자로 옮기면 탄현(炭峴)이 되는데 이는 백제시대때 좌평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이 신라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요충지였다. 이러한 명칭은 대동여지도에서도 나타나는데 백제 탄현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교통로의 연결망과 산성이 있는 것으로 이곳이 탄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삼국사기에도 나타나 있다. 백제가 501년(동성왕 23) 7월 “탄현에 성책을 설치해 신라를 방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바로 이 숯고개 동편에 있는 고중리산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백제는 475년(개로왕 21)에 한성에 있던 왕도가 고구려에 의해서 함락되고 왕이 전사하자 아들 문주왕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동성왕은 그 왕명이 말하는 것처럼 신라와의 접경지대의 방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숯고개는 신라와의 국경에 이르는 3개 노선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숯고개의 남쪽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싸리재를 넘으면 육십령을 거처 신라에 이르게 된다. 또한 북쪽 기슭에서 금산군 남쪽에 있는 두시이 현(현 당리면)을 지나면 무주를 거쳐 신라 땅인 무산현에 이르며, 북쪽인 배재를 넘으면 금산을 거쳐 지금 충청북도 옥천인 옛 고시산군에 이를 수 있다. 이 무산현과 고시산 등에서는 신라와 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최종편집: 2025-08-14 03: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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