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면서 족보 버리는 세상에 족보 얘기 진부하다 하겠지만 지금도 족보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씨족이 있으니 족보가 일반적으로 무시당할 책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 전주마전에서 ‘전주이씨’를 제대로 알았는데 ‘서부신시가지개발’로 100여 대촌 전주이씨 ‘시중공파’ 집성촌이 사라지고, 오직 무덤과 재실만이 그 흔적을 짐작케 한다.
여기 살던 ‘시중공파’가 전주이씨의 맥이다.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태조[성계]의 고조부[이안사]가 집안 여러 사람을 이끌고 삼척으로 갔을 때 전주에 그냥 남아 지켜온 집안이 곧 시중[이단신]공 파이다. ‘이단신’은 고려 초 가슴 조이며 살았다.
이용부가 형이고, 용부 아들이 넷(준의, 의방, 린, 거)인데, 둘째 의방이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정략가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피살되자 그 형 준의도 죽었다.
이 때 셋째 ‘린(璘)’은 덕이 있어 목숨을 간신히 부지해 그 7세손이 이성계이다. 넷째 ‘거’는 조위총 반란군의 편이었다. 반란군을 진압하려고 최균(전주인)이 갔는데 ‘거’가 성문을 열어 최균이 조위총 군에게 죽었다.
이 행위는 형 이의방에 대한 배신으로 형과 적이 되었다. 바로 ‘거[평장사]’ 집안과 ‘이판공파’가 합보를 했는데, 근래 ‘시중공파 대동보’를 하자는 제의가 왔다. 깊이 생각하자는 측이 한재공 자손들이었다. 합보도 좋지만 이제까지 없었던 일이므로 ‘왜 그랬을까?’ 이 대목을 알고 결정하자는 의견 지당하다.
옛날 『이판공파(승길)+대제학공파(자을)+예판공파(거)』 3파의 합보와 《황강공[이문정]세보》가 하나 되는 데는 선조가 안했던 일이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된다.
왕가 《선원보》에 이준의, 이의방 형제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실이 역사관이요, 한국 정신이다. 족보를 버리는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족보에 함부로 손대는 허장성세나 어설프게 아는 인사가 더 큰 문제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