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光復)되었으니까 그 직후가 되겠지요.
미군장교와 통역관이 넓은 들판을 지프차로 지나가는데 그 장교가 문득 하는 말이 “한국에는 산 밑에 거름더미가 많군요”라고 통역관에게 말했습니다.
통역관이 무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통역관의 대답을 들은 그 장교는 “아하! 그렇군요. 거름더미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군요. 내가 잘 몰랐습니다”라고 했다는 웃지 못 할 일화가 있습니다.
통역관은 초가삼간(草家三間)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형태와 구조 등을 설명해 주었겠지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에게마저 잊혀져가는 ‘초가삼간(草家三間)’... 어느 산골에 가더라고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지난 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농촌환경개선을 주요정책으로 내놓으니 국민들은 이에 고무(鼓舞)되어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하고 외치면서 ‘새마을운동’으로 승화되어 초가삼간은 스레트 지붕으로 단장되고, 꼬불거리는 마을길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반듯반듯하게 잡혔습니다. 국민들은 이를 만끽하면서 가을에 지붕 걱정을 않게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초가삼간은 민초(民草)들의 애환(哀歡)이 녹아있는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고관대작(高官大爵)이나 세도가(勢道家)들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풍경을 달고, 문간방에는 청지기를 두어 떵떵대며 살았지만 초가삼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수준에 따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의식주... 즉, 더위와 추위를 막아내는 초가삼간이 있기에 등 따뜻하고 배를 곯지 않으면 다행으로 여기고 이에 의지하면서 빗물이 세지나 않을까, 바람에 이엉이 날아가지나 않을까... 이를 보살피면서 초가삼간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이웃과 끈끈한 정을 나누면서 소박한 삶을 꾸려왔습니다.
추수(秋收)가 끝나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서로가 품앗이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돌보며, 울타리와 담장을 단속하고 나면 산이 있는 사람은 있는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대로 겨울 땔감을 걱정했습니다.
초가삼간 한 칸은 부엌(지금의 주방 또는 조리실)이 되며, 아랫방 아랫목은 노인네가, 윗방은 젊은 내외가 젖먹이 감기들새라 가운데 눕히고 누더기 이불에 잠을 청합니다.
새벽녘 닭장의 장닭이 ‘꼬끼오~’하고 목청을 높이면 잠이 깨어져 외양간(소를 기르는 공간)에 쇠여물(소먹이)을 끓여줍니다. 윗방 아랫목이 다시 따스해지지요.
집 앞에는 마당이 있어 보리와 벼와 잡곡들의 타작자리가 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남은 곳은 텃밭으로 채소를 심어 밥 반찬이 되어 밥상에 오릅니다.
햇빛이 잘 비치도록 두 서너칸 허청을 지어 한쪽은 외양간, 한쪽은 뒷간(화장실)이 되고, 그 밖에는 쟁기와 써레, 멍석 등이 놓이며, 쇠스랑과 호미들이 걸리고 식량을 보관하는 뒤주 옆에는 닭둥우리가 있습니다.
양지바른 뒤곁에는 고추장과 된장을 숙성시키는 장독대가 있고, 그 옆에 땅을 깊숙이 파서 겨울김치독을 묻어두지요.
두툼한 지붕의 처마 속은 참새들의 겨울나기 둥지입니다. 말 그대로 전근대적(前近代的)인 삶의 터전이지만 자연친화적인 농경사회였던 조상들의 지혜였습니다.
다음은 좀 엇갈린 사연이지만 초가삼간에 사는 사람들의 너무나도 혹독한 시련이었기에 몇 줄 적습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납니다.
남북이 서로 피를 흘리며 격돌하는 도중 UN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북으로 가는 길이 막힌 인민군과 그들을 동조하는 사람들은 산간오지(山間奧地)에 웅거하게 됩니다.
안 먹고는 못살기에 약탈과 살상을 일삼으며 출몰하기에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초가삼간에 사는 사람들은 삶의 터전인 초가삼간이 불에 타버렸으니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 살길을 찾아 추위에 떨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동분서주하였으니 산간부인 우리 화산(華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연하여 산에 올라가 장작을 마련하여 육군제2훈련소(연무대)까지 삼십리 길을 새벽같이 출발하여 꽃밭재(연무대로 가는 충남과의 경계)를 넘는 장작짐 행렬은 요즈음 등산객행렬을 방불케 했습니다.
가까스로 장작을 팔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장작 판돈을 손에 쥐고 곧장 육군제2훈련소의 부식품을 공급하는 두부공장으로 달려가 줄을 서서 두부를 짜내고 남은 비지를 사서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면 서산에 해가 걸립니다.
곧바로 쌀독 바닥을 소리가 나도록 긁어내어 한 끼라도 늘려먹기 위해 미리 삶아두었던 시래기에 비지를 섞어서 죽을 쑤어 만들어 젖떼기 어린 것을 달랩니다.
그렇습니다. 6.25를 겪어온 초가삼간에 사는 사람들의 말하기도 싫은 시련이었습니다.
정령 세도가들의 성화에 억눌려 오다 일제의 수탈과 식민지정책에 시달리기를 36년... 900여회가 넘게 외침(外侵)을 당했다는 오천년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지러지면 고쳐 세우고, 타버리거나 떠내려가면 망건의 당줄을 힘껏 당겨매고 머릿수건을 바짝 동여매면서 다시 세워서 궁극적인 삶의 수단에 매달려 왔습니다.
분명 선진국 사람의 눈에는 거름더미로만 보이고, 이제는 우리들에게 조차 잊혀져가며 어디를 가도 찾아 볼 수 없고 조상들의 삶이 녹아있지만 민속촌의 구경거리로나 남아있는 ‘초가삼간’.
오천년 역사의 뒤안길에서 면면한 정사를 이어오게 한 밑거름이요 받침대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에 마음을 도사려 초가삼간의 애환을 되새겨봅니다.
/전우봉 (82·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