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완주에는 진묵대사와 관련한 설화 및 일화 등이 많은 사찰에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진묵대사의 사상을 학술대회를 통해 역사적으로 새롭게 조망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찰은 많지 않다.
용진면 간중리에 위치한 ‘봉서사’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겨울이 지나고 한낮의 기온이 포근함을 주는 이 주말 가까운 용진면 봉서사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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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僧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千年 古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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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사는 용진면 간중리 동쪽에 있는 서방산(西方山)의 수목이 울창하고 산세가 수려한 계곡에 위치해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사찰이다.
서방산은 서대산(西大山)이라고도 하며, 봉서사라는 이름은 절이 위치한 서방산이 봉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봉이 깃든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봉서사는 727년(성덕왕 26년) 또는 736년에 해철(海澈)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문헌은 없다.
고려시대에는 보조선사 지눌과 나옹 혜근(慧勤)이 각각 중창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16세기 말 ~ 17세기 중) 때에는 진묵대사가(震默) 이곳에서 전국승려대조사로 추앙받으며 절을 중창했다.
봉서사는 1945년까지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사찰이었으나 안타깝게도 6.25전쟁 때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
그 후 1936년 주석한 한국불교태고종 스님인 호산스님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하고 1975년 삼성각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대웅전, 관음전, 칠성각, 진묵전, 요사채, 전북 유형문화재 108호인 진묵대사부도 등이 있다.
이 봉서사에는 해철선사. 보조선사, 나옹선사, 진묵대사, 호산스님 등 불교계의 큰 인물들이 거쳐 간 역사와 전통이 있는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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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의 신기한 이야기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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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사에는 이곳에서 출가한 진묵대사와 관련한 기이한 설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절에서 수도하던 진묵대사는 자주 해인사를 내왕하면서 대장경을 모두 암송했다. 하루는 제자를 데리고 해인사로 갔는데, 그날 밤 대장각 옆에서 불이나 도저히 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진묵대사가 솔잎에 물을 적셔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번 뿌리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불길이 잡힘으로써 대장경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진묵대사가 지팡이로 바위를 뚫어 발견했다는 약수터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약수 맛에 끌려 자주 찾는다고 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상좌(上佐)에게 ‘내가 8일을 기한으로 하여 시해(尸解)로 천상에 다녀올 것이니 절대로 방문을 열지 말라’며 단단히 이르고 천상으로 떠났는데, 진묵대사를 시기하던 봉곡이 봉서사로부터 서기가 하늘로 뻗친 것을 보고 ‘내가 저 기운을 받으면 진묵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며 봉서사로 올라갔다.
봉곡이 서기가 뻗치는 법당 앞에 당도해 진묵대사를 찾자 상좌가 나와서 ‘대사님이 출타하신지 얼마 됩니다’고 말했다.
봉곡은 서기가 뻗치는 법당문을 부수고 들어갔더니 진묵대사가 앉아 있고 그의 몸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서기를 못 받을 바에는 차라리 진묵대사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마당에 나무를 쌓고 시신을 화장 했다.
이때 진묵대사가 돌아와 공중에서 말하기를 ‘너와 내가 아무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러느냐’고 말하자 봉곡은 ‘저것은 요귀의 소리다 듣지 말라’고 상좌에게 말했다.
봉곡이 진묵대사의 손가락뼈 한마디, 수염 한 올도 남김없이 태워버리자 진묵대사는 돌아올 방법이 없어졌다.
진묵대사가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했으나 봉곡의 질투로 인해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 가.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진묵대사의 죽음에 관한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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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가 자라는 진묵대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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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로 지정된 이 부도는 진묵대사(1563∼1633)의 부도다. 진묵대사의 이름은 일옥이며 진묵은 그의 호다.
대사는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에서 태어났는데,이 화포리란 곳은 옛날의 불거촌으로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세에 출가하여 주로 완주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봉서사에서 선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불경을 강구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그의 법통을 이은 종통이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의 신비스러운 기행이적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또한 불교관계의 학문 뿐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 부도는 화강석으로 지대석위에 상하이단의 대좌를 갖추고 구형의 탑신을 얹어 팔각의 개석을 구비하고 있으며 개석상단에는 보주형의 상륜을 얹고 있다. 전체높이 1.8m의 조선시대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는 석조부도이다.
신기한 것은 이부도가 해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어 많은 불교 신도들로부터 감탄을 안겨주고 있는데 과학적으로는 암석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부도가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고 판명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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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진묵조사 사상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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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사는 진묵대사의 사상을 학술대회를 통해 역사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10년 12월 삼례향토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1회 진묵조사 사상학술대회에는 300여명의 불교신도와 주민, 관련학자 등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 학술대회는 그동안 신비와 설화 속에 가려져 있던 진묵조사의 사상의 연원과 유교와의 교섭, 민중 속에 널리 유포된 설화의 함의 및 신종교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밝혀짐으로서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봉서사 영산작법의 유래와 계승 및 범패와 작법의 특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봉서사 영산작법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규명했다는 점에 있어서 큰 의의가 있었다.
이날 학술대회를 개최한 봉서사 월해 주지스님은 “진묵조사의 출가지이자 주석지이며 열반지인 봉서사가 주축이 되어 앞으로 부처님의 화신 진묵조사의 사상을 조망하고 헌창하는 사업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진묵조사의 사상과 영산작법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차적인 학술대회를 지속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