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우리는 국치일(國恥日), 일본은 조선을 병탄(倂呑)한 날이다. 이날의 모습을 함께 살펴보자.
제목도 없이 『全羅北道 雲峰郡 郡內面 申鳳璜妻 崔召史/ 右者克ク 貞節ヲ 竭シ 鄕黨ノ 模範タルニ 足ル 仍テ 金拾圓ヲ 賜ヒ 其德行ヲ 表彰ス /明治四十三年 八月 二十九日/ 統監 陸軍大將 正三位 勳一等 功一級 子爵 寺內正毅□』표창장 전문이다.
대충 해석하면 “전라북도 운봉군 군내면 신봉황 처 최소사/ 우자는 지극한 정절을 다해 향당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흡족하여 이에 금 10원을 내리며 그 덕행을 표창함/ 통감 육군대장 정3위 훈1등 공1급 자작 사내정의□” 이런 내용이다.
△최소사(崔召史)는 일찍이 혼자되어 뼈를 깎는 아픔을 이겨냈다. 가난과 질병 외에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한 평생 홀몸으로 이고지고 사셨으니 나는 새 기는 짐승들도 경모하였다.
하물며 사람들이야 누가 됐던 그 공적을 현창함은 너무나도 당연한 도리이다. 정절은 충·효와 함께 인륜도덕의 최고 가치 아닌가. 자손과 선비들은 길가에 반드시 정려(旌閭)를 세워 온 천하 백성들의 귀감으로 삼았으며 그 덕행을 천추에 길이 전해지도록 노력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8월22일 조선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한일합병조약을 맺었고, 8월29일 발효시켰다. 남의 나라를 먹으면서 시골 일개 과부를 찾아 표창했으니 그 치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날이 아닌 ‘통감’ 마지막 날, ‘통감’ 이름으로 이토록 세심하게 마무하고 ‘조선총독부’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게 정치요, 행정이요, 고도의 포섭 정책이었다.
‘데라우치 마사시케’를 칭찬하자는 게 아니라 이들의 능숙한(?) 통치수단에 놀라 반면교사로 삼자는 것이다.
내년 6월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소양면 화산서원에 배향된 육대춘(陸大春)의 관직생활을 알아보고 보따리를 싸면 후일에 많은 칭송을 들을 것이다. 신정부에서 물러날 관리들도 마찬가지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