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글씨 쓰는 사람이 많아 예향이라 한다. ‘막걸리 집’ 벽에도 흔하게 붙어 있어 귀한 글귀를 쉽게 볼 수 있다. 전주에서 눈에 잘 띄는 글씨는 ‘풍남문(豊南門)’ 3자와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서기순 씀)’ 다섯 자이다. 한글로는 호남고속도로 전주 요금소 현판 ‘전주(여태명 서)’가 많은 화제를 던져준다. 조선시대 시에 능한 여인이야 이따금 있었지만 글씨로 이름난 사람은 드물었다고 한다. 《앙엽기(?葉記)4》를 보니 부여서씨 만죽(萬竹) 서익(徐益)의 소실이 글씨를 잘 썼다고 적혀있다. 1613년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 백 냥을 빼앗은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일당 △박응서(영의정 박순 서자) △심우열(심전 서자) △박치의(평난공신 박충갑 서자) △박치인(박유랑 서자) △이경준(이제신 서자) △허홍인 △서양갑 7인은 적서 차별 에 불만을 품고 ‘윤리가 필요 없다’는 뜻의 「무윤당(無倫堂)」을 지어 도적질을 일삼았다. 여기 ‘서양갑(徐羊甲)’이 서익의 서자이고, 글씨 잘 썼다는 여인이 서양갑 어머니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옥봉(玉峯) 이씨(李氏)는 여인이 쓴 큰 글씨를 받고 이런 찬사를 보냈다. 『글씨의 굳셈이 하늘 밖 곰 형상인데(?勁寫成天外熊)/ 원화체 옛 자취 여기서 볼 수 있네(元和脚迹見遺?)/ 체는 가녀린 혜초 같지만 힘 건장도 하여라(體若蕙枝思卽壯)/ 섬섬옥수로 이처럼 옹골차게 쓰다니(指纖叢玉掃能雄』 서익이 고산에서 ‘만죽정(萬竹亭)’을 짓고 일시 살았다는데 이 때 이 여인과 함께 지냈다면 고산은 희한한 고장이 아닐 수 없다. 고산 동편 오성교 바로 위 보 안 물 가운데의 바위 글씨 ‘세심정(洗心亭)’ 3자의 체가 ‘가녀린’데 혹시 이 여인의 글씨가 아닌지. 왜 글씨 새기고 끝에 성명을 붙이지 않았나? 여자라서? 소실이라서? 작당 패거리 엄마라서? 고산 사람들이 풀어내야 할 한시가《우천유고(牛泉遺藁)》에 있는데 “춘제 세심정(椿題洗心亭)”이다. ‘만죽정’, ‘세심정’이 같은 정자냐, 아니냐도 완주 의 지식인들이 밝혀내야 할 몫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06: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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