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민이 자기 군을 자랑함은 당연한 일이다. ‘화암사’는 우리 군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바르게 소개해야 할 소중한 절이다.
그런데 초창기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고찰로만 알 뿐이지 자세한 기록이 절에도 민가에도 없다.
다만 “문무왕 때 세웠다”는 정도이다. 이 사실을 믿고 ‘가설’을 세워 창건 연유를 짐작해 보면 “백제를 이긴 신라가 ‘유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서기 660년 백제가 망했고 △신라 문무왕의 재위(661∼680) 기간은 20년이었다. △그렇다면 새로 얻은 백제 땅에 왜 절을 세웠을까?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해 5만 병력을 이끌고 운주면 ‘숯고개[炭峴]’를 넘어 ‘논뫼[論山]’을 거쳐 ‘황산[連山]벌’에서 싸워 이겼다.
△바로 이 통과 과정에서 많은 피를 보았으니, 원귀를 달래고 민심을 위무해 유민들의 맘을 끌어안아야만 했다. 이게 정치이다. △이를 위한 고도의 방책은 종교의 힘이다. 당시 교화 수단으로는 불교를 내세워 부처님께 비는 방도가 단연코 최고였다.
△그렇다면 절을 어디에 세울까? △뜻 깊고 상징성이 강한 곳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관점에서 골라잡아 세운 절이 바로 경천면 가천리 화암사(花巖寺)이다. △이 곳은 백제의 동편 땅 좋은 조건을 두루 갖췄다.
△만일에 대비해서는 감히 넘보지 못하게 방어 조건도 있어야만 했다. △가파른 바위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절묘한 자리이다. △저명한 스님이 와서 강설해야 설득력이 높았기에 △원효(617∼686), 의상(625∼702)이 왔을 것이다.
관련된 유적들이 말해 줌으로써 고도의 정치적인 배려가 깔려있는 ‘해원하는 절’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정치에서 어렵고 괴로운 분은 백절문의 한시를 외우면서 3∼4년 거처 할 만 한 곳이다.
강원도 백담사(白潭寺)처럼 국보 사찰이다. 절은 쓴 나물 반찬에 밥 한 끼 주는 아량이 있었으면 한다. 지난 날에는 한학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스님들과 밤을 새웠지 않나.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