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400여 년 전부터 제조한 것으로 전해 온다.
천연 조건으로 물이 맑고 주변에 질 좋은 닥나무가 흔해 가내 제지업이 시작됐으리라 짐작한다. 입에 오르내리는 장한 인물이 강민석(姜敏石) 씨이다.
강민석 씨는 개화기에 이미 예수를 믿었고 그 뒤 장로가 됐으며, 지소(종이 제조업)를 차려 돈을 많이 벌었다.
번 돈으로 소학교와 예배당을 세웠고 야학을 열어 시골 사람들을 가르쳤다.
가난한 농민에게는 농토를 사주고 선행에 앞장섰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지업에 타격이 오기 시작하더니 해방 후에도 경영이 어려워 사업이 힘들었다.
마침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완주 을구에서 입후보했으나 고배를 마시고부터 표 나게 집안이 기울었다. 당시 54세로 학력은 보통학교 졸업, 직업은 농업, 무소속이었다.
강민석 씨의 어려움은 곧 송광 한지산업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이 때 양지에 풀칠하여 만들어내는 소위 ‘양한지’가 나와 한지의 사양화를 촉진시켰다.
아! 1970년대의 닥치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나 당시의 공장 흔적과 제조용품은 간 데 없으며, 용어조차 가물가물 쉬운 설명도 알아듣기 어렵더니 빛바랜 사진 몇 장이 송광의 영광과 역사를 말해 줄 뿐이다.
김환득(金煥得) 선생의 책 《사라져버린 완주의 한지》에 절절한 이야기가 많다. 『…손으로 만든 한 장의 종이에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땀과 정성이 스며 있다.…기계의 톱니바퀴가 돌고 도는 데 따라 쏟아져 나오는 기계지의 홍수 속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동안 인생의 본디 성품 순박성을 잃어간다는 것이니 조상의 슬기를 어찌 알며, 조상의 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어찌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단 말인가….』
80 노옹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리워도 만날 길 없네. 김새롬이도.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