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산을 구해 묘 잘 쓰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 여기고, 명당이라면 멀고 가까운 걸 가리지 않았으며 지사[관] 시키는 대로 따랐다.
부자는 큰돈이 들었고 가난뱅이는 늘 뒤처진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 잘 못 되면 무덤 타령이었다. 결국 투장(偸葬)이 생기고 산송(山訟)이 잦았다.
지금 보면 안타까웠던 일로 후손들마다 부담이 크다. 성묘하기 어렵고 금초 역시 힘들며 혹 잊어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진다.
종중마다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기에 이 곳 저 곳의 묘를 한 봉분 안에 모시는 ‘일봉다장(一封多葬)’의 지혜로운 이장 문화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합리적인 숭조사상으로, 첫째 땅이 절약되며, 둘째 파묘한 자리는 새로운 땅이 된다. 고산면 능성구 씨는 서봉리에 13위를 한데 모셨고, 전주 이씨 아무개는 왕궁면 갈전리에 16위 합봉을 추진 중이다.
서로 따르고 협조하며 격려함으로써 산 사람 중심의 묘제로 정착시킬 만하다. 자주 가기 좋고 관리가 편리하며 혈육 간에 가까워져 이래서 ‘산 사람 중심’이라 한다. 남들도 잘 알아 실전할 걱정이 사라진다.
화산면 한우물 최 씨네는 오래 전에 실행했다. 너른 묘역은 다음 세대에 짐이 되니 넓힐 필요가 없다. 3년 시묘살이 시대가 아니다. 해마다 금초하며 시제지낼 자손들이 과연 몇이더냐?
이하응 흥선대원군은 묘 때문에 시끄러웠다. 1822년 아버지 남연군이 죽자 묘지를 고르는 데 가야산은 ‘2대 천자(天子)’가 나올 자리고, 오서산 자리는 ‘만대 영화’를 누릴 명당이었단다. 가야산은 원래 절이 있었는데 2대 천자에 혹하여 폐찰 시키고 묘를 썼으며, 그 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은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이를 ‘묘지 난리’라 할 수 있다. 죽어서도 인격대로 대접을 받는다. 부인이나 자손의 묘가 위에 있는 아름다운 사연의 집안이 있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