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유학자만이, 『성경』 목사만 보는 책 아니다.『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이 글 누가 읽어도 좋다. ‘왜 친일파 들춰내느냐’ 하겠지만 이 문제는 읽고 나서 따지자. △백남신(1858-1920)은 임실 관촌 태생. 적응력이 뛰어나, 전주·삼례·익산·서울에서 좋은 자리 다 거치며 부자이었다. 서기1894년 36세 때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으나 사람 아니 죽고 부서진 것 없이 관과 혁명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잘 이뤄졌음은 백남신이 양편 사이에 들어 타협 잘 시킨 까닭이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그의 이름 ‘낙신(樂信)’을 보고 “3남에서 믿을 사람은 오직 너 뿐이니 ‘남신(南信)’으로 부르자” 이래서 백남신 승승장구했다. △벼슬과 맡은 직책이 부자 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일본이 조선 병탄으로 나라 망하고 한반도는 돈 덩어리 일본 식민지였다. △일본은 착실한 심복이 필요한데, 마침 백남신이 쓸 만하여 손을 잡자 물 만난 고기가 됐다. ‘일본을 어버이’처럼 받드는 사람을 ‘친일파(親日派)’라 했다. △그의 집에는 하인만 50명, 인력거가 두 대로, 하나는 아들(인기)이, 또 하나는 식구가 타고 다녔다. △당시 인력거 위는 자가용, 조선총독과 고종황제만이 캐딜락을 탔는데 이때 백남신도 캐딜락이 있었다. △1911년 그의 재산은 50만 원(2009년 가치로∼500억 원) 이상이었다. △1918년 8월 27일자 <매일신보> 3면 기사 “…백남신이 일본 시베리아 출병에 크게 감동, 그가 저장한 벼 4천 석(石:시가 6만원)을 군용미로 헌납”했다는 사실을 소개한 뒤 “이는 근래 처음 보는 일이며, 이번 출병을 두고 군용미 헌납은 내선(內鮮)인 동씨(同氏)로서 처음이라” 칭송했다. △‘화성농장’이 이 집안 것. 1936년 화성농장은 ▲답[논. 1정보=3천평] 1,483정보[14,707㎡] ▲전[밭] 2,203정보[21,848㎡] ▲총합 3,686정보[36,555㎡/화산면 반절 정도] 대지주로 직원 17명, 사음[마름] 55명, 소작인 4,700여 인 대농장이었다. 그런데 완주에 남긴 선행 흔적이 귀하다. △전주시내 학인당과 수원백씨 효자각이 이 집안 소유며 △1920년 3월 16일 전북 부호 백남신 서울 낙원동 자택에서 생을 마치자 재산은 아들 백인기(白寅基)에게 넘어가 잘 운영됐으며 1946년 그 부인 이윤성(李潤成) 씨가 본인과 손자 이름으로 된 토지 104만 평을 내어 ‘재단법인 화성학원(華星學院)’을 설립 남성(南星)중학교를 세웠고, 이가 발전 명문 익산 남성중고교와 남성여자중고교이다.△전주 백남신은 수많은 돈을 ‘대순진리회’ 상제님 천지공사 경비로 헌성했다. 나머지 얘기는 삼례 분들이 덧붙이기 바란다. 2025년 4월 24일 11시 서울 종로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서 순국 130주기 추모제가 열린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