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1941.12.8.~1945. 9.2.:항복문서)과 6·25사변(1950.6. 25~1953.7.27) 시작과 끝을 봤고, 조선총독(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미군정 사령관(존 R. 하지 중장:1945 ~1948년) 가슴팍 훈장(사진)에 위압감 느꼈던 농민들의 삶을 정리해본다.
△2모작 시절 보리농사(10월~6월/9개월):쟁기로 논 갈아-흙덩이 부수는 쇠스랑질-씨앗·거름 뿌리고 덮어-정월 보름 넘으며 밟아 풀 매어 비료 주며-망종 지나 낫으로 베어-홀태로 이삭 따 타맥-방앗간을 거쳐야 보리쌀이 됐고, 넘어온 보릿고개 배고픈 눈물고개이었다.
△벼농사(5월~11월/7개월):못자리-모내기-물대기-김매기-비료주기-피살이-추수-훑기-말려 방아 찧기, 대충 적은 이 과정마다 뼈마디 오도독 소리 나야 입에 밥알이 들어갔다.
△보리밥 먹으며, 보리풀-쌀밥 먹으며, 바닥 폴(산의 나뭇잎) 허리 휘도록 짊어 날랐다. 김장-나래 엮어 지붕이기-밤 섶 내다 동아줄 틀어 울타리-겨울 내내 새끼 꼬아 가마니 짜 꿰매며-망태·섬·멍석·메꾸리(방언?) 만들고-짚신삼기-때때로 땔감 해오기-오줌 똥 퍼내기, 부지런한 사람 개똥망태 메고 다녀…손가락 지문이 사라졌다.
짚단 먼지 뒤집어쓰고 마시며 여기에 이불 펴 새우잠 자는데 이 고생 중 양식 떨어지면 곱장리 빚 얻거나 선 품삯 내다 조반석죽 목구멍 풀칠하는 식구들 영양실조로 누우면 못 일어나 마을마다 과부 많았다.
△여자들 길쌈하기에-산후조리 없고, 많은 권속 거두며 바쁜 농사 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었다. 어른 모신 큰 집은 제사·생일 여러 번, 밭일은 여자 몫, 조반 설거지 마치면 새참 준비 바쁘며, 밤엔 모기 낮에는 파리 떼에 시달리고 ‘오줌소태’ 죽을 지경이지만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하며 살았다.
논 열 마지기 미만 소농, 10두락 이상 중농, 스무 마지기 넘으면 대농이나 집집마다 근검절약 애처롭게 살았다.
△지금도 연탄 때는 집 있지만 거의 TV,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청소기, 전기밥솥 갖췄고, 가스(기름)연료, 침대생활 편의품에 시설 좋은데다 신사복, 작업복, 등산복, 운동복, 잠바, 내의, 외투 성한데 의류수거함에 넣는다.
자차 있어 고무신 닳을 일 적고 의료보험제도 좋아 잔병 걱정이 덜며, 쌀밥에 외식 여행·해외나들이 쉬우나 정세불안으로 질문·안부 묻기 사라지고, 어른 만나 ‘말씀 낮추세요.’ 듣기 어려운 시대다.
청년실업-혼인기피-저출산-소멸위기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교수들 해결방안 그 설명 어물어물한다. 여야싸움 자기네 처지가 위급하다며 남 걱정 들어 줄 형편 아니란다. 뭘 믿고 의지하며 살아야하나! 연예인 K씨 아내 남편 생명보험 24개들어 수령자 남편 가족 아닌 본인과 데려온 딸이란 말이 있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