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직장 일 접으며 처음 맞는 정년! 허탈하고 감회 어수선하다. 구정태 선생 봉동초등학교에서 정년! 퇴직자 모임에 나가니 앞으론 아호 부르기로 하자기에 고향 ‘三奇’, 면 이름 ‘高山’ 어떨까 망설이다 공직 퇴임학교 ‘鳳東’을 자호 삼았다.
이름은 어떤가. 아버님 3형제 큰 집 작은 집 있었고, 백부(연복) 계속 딸을 낳아 남아선호시대 조부모 조마조마하시다 둘째 집(연설·전주이씨)에서 맏손자 태어나니, 할아버지(형조) 작명하시며(항렬 ‘書’ 제쳐두고), 성 ‘구(具)’ 다음 첫 자 뭣으로 할까 여러 생각 중 ‘바를 정(正)’ 좋지! 두 번째 자에 고민… ‘바를 바엔 크게 바름이 최고야!’, ‘큰 대(大)’자를 택해 ‘구정대(具正大)’. 공명정대(公明正大) 평생토록 빛 낼 이름이라 기쁘셨다.
출생신고 직전 외조(이병교)께 보이며 고견을 당부하니 “할아버님 작명에 외조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부언을 피하시자 “그래도요” 이 말씀에 “그럼 점(,) 하나 보태볼까요?” 이러시며 ‘구정대’에 점찍으니 ‘구정태(具正太)’.
친할아버님 “묻기 잘했습니다. ‘대서양(大西洋)’보다 ‘태평양(太平洋)’이, 소백산(小白山)보다 태백산(太白山) 넓고 높지요. 큰 학자라 다르십니다.” 두 사돈 손잡고 기뻐하셨다.
구정태 전주고등학교 나와 동네 평택 임씨(林氏) 재실 봉림재(鳳林齋)에서 겨울철 짚단 두텁게 깔아 그 위에 돗자리 펴 이불 덮고 잤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잉크 병 얼어있는 방에서 독학, 문교부 보통고시 공채에 응시 합격하자, 당국에서 본부근무 의향을 물으니 “전 고향 내려가 봉직하렵니다.” 이래서 당시 전북교육위원회에 출근하는데 아침에 제일 먼저, 오후 가장 늦게 퇴근… 곧 관리과장 등 요직을 두루 맡았으나, 청빈하여 새마을운동시절 삼기리에서 가장 낮은 초가집 변함이 없었다.
행정직에 근무 중 교육감 강권 따라 교직으로 넘어왔다. 그동안 전북대에서 교육학박사 학위 받았고, 전북대·전주대·전주교대에서 18년간 강의했다.
간중초등학교장을 거쳐 봉동초등학교장에 취임했을 당시 교원노조 발전기라 학교장 무척 힘들 때였지만, 몸에 밴 도덕심·전문성을 품고 봉직 전북초등교육 최우수학교 표창장을 받았다.
해박한 교육이론, 천품인 청빈성, 밝고 맑은 얼굴 단정한 차림, 조부·외조부가 지으신 ‘구정태’ 성명 세자 하늘 이치라 받드니, 60여 교직원 누구 한 분 교장 말에 이론 없이 행정의 달인, 교육의 사범이라며 존경했다.
저서 『교실예술』이 있고, 고산 백현사에 모신 향현 죽유(竹牖) 구영(具瑩) 선생 후손으로 일본어 잘하며, 부인 고(高) 권사 내조 훌륭하고, 아우 인서 외 혈육 모두 반듯하다. 이 글 ‘완주군개청90주년기념연하장’이다. 『화산면지』·『고산면지』 발간에 힘써 환영받았으며, 만경강 주변은 물론, 호남에서 으뜸인 ‘석학(碩學)’이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