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 구름가고/ 허리 아래 맑은 물 흘러/ 기린봉 해 돋으니/ 와룡산 달이 진다./ 이 사이 와삼(臥三)들판/ 벼 만석 보리 천석 거뒀지/ 내 별명 유하당/ 우리 마을 강촌이었다.// 봄이면 종달새 울고/ 겨울엔 두루미 오며/ 골목은 애들 놀이터/ 안방에 다듬이 소리/ 여기저기 마을마다/ 고운 인심 너도 나도 형님·아우/ 내 이름 이승철/ 우리 동네 강촌이었다.”
이 글 AI에 맡기면 곡(曲)이 나온다. 이러니 노인 죽기 싫고 젊은이 혼인 잊는다. 훗날 읽어줄 사람 없는데 매주 글을 써 신문에 싣는다.
만경강 상류 ‘수성목 두 물머리’ 남천(南川) 왼편. 사립문 밀고 나와 100m 달려 풍덩 물에 뛰어들었다. 다슬기·물고기 흔했고, 돌·모래·자갈 많아 돌담 치기 일도 아니었다.
개울 막아 물 품어 금방 고기 한 대야! 미꾸라지는 대접도 받지 못했다. 김봉회·김재송 가을에 계살 치면 하룻밤 수백 마리 잡았고, 봄철 보막이는 작인들 경사이었다.
초겨울 살얼음만 얼어도 썰매 들고 나갔으며, 냇물 얼수록 좋았다. 모닥불에 옷 태워도 즐겁고, 바짓가랑이 물에 젖어도 두렵지 않았다.
외식 모르던 시절 마늘·파 움트면 초봄부터 천렵 물고기 국물 왜 이리도 맛 좋았던가. 이 대답 섬진강 김용택 시인이 잘 알 것이다.
하와룡 김봉회 물고기 몰아 손으로 쥐어 올렸다. 그 어머님 게장 담가 놓으면 꼬맹이들 밥 없이 먹으며 짜다 소리 없었다.
여름에 큰물 지면 삼기 사람 징을 쳐 물 조심 걱정을 해도 갱이·궁뜰 주민은 소쿠리 들고 고기 잡으러 나섰다. 용감해서냐? 강촌 사람들 기질이었다.
여름철 책보자기 저학년에 맡기고 헤엄쳐 3km 고산초등학교에 등교했다. 여름 어두운 밤풍경! 부녀자들도 내에 나와 시끌벅적 목욕을 하면 남성네들 모르는 척 비켜 줬으며, 들어가 연기로 모기 몰아내고 잠들면 금방 날이 샜다.
김병만 연예인 집에서 내까지 10m 이렇게 가까우니 물 본 고기 마냥 내에서 살아 그 기질 담대해 외국 어려운 오지 누비며 산다. 김군 동네 우리 마을 이웃이다.
구연안, 구순회, 김보홍 배터리로 하룻밤에 고기 한 바구니씩 잡아 팔았다. 용소마을-긍뜰-갱이-삼기정 강촌 분명한데 진취적인 삼기 분둘(구연길, 구연설, 구연안, 구연재, 구충서, 홍종화)과 가양 사람(김인묵·재순·재충, 임병원) 물 건너 농사를 지었다.
1970년 떠나온 내 고향 지금 둑은 직강공사로 가파르며 풀은 무성하고 자갈 하나 뵈지 않고 이 강 건너 영구차 지나가도 이름 불러줄 사람 하나 없구나. 남북이산가족 심사 알만하다. 천국은 가까워지나 강촌 고향 날로 멀어만 간다.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 탓이겠지!
내 고장은→江村(강촌)→江陽(강양)→佳陽(가양)→江里(강리)→‘갱이’다. 어릴 적 ‘대한(조선)독립만세!’ 부르던 생각 절로 나는데 광복계원 찾아도 대답 없구나.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