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시대 애국자 독립군 부부생활을 넌지시 굽어다보면 어느 한 구석 허허 하하…이래 본적이 없다.
다른 분은 제쳐 두고 우선 삼례 출신 김춘배(1906. 2. 29-1942. 7. 8) 의사를 살펴보자.
부인 전명숙(全明淑:1904. 3. 28-1935. 10. 15)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대동 50번지 호주 전일봉(全一奉)의 장녀로 1924년 10월 10일 김춘배와 혼인했고, 김춘배 의사는 1927년 2월 초순 만주 돈화현 의군부에 가담했으니 신혼생활 겨우 28개월이었다.
1차 징역 7년 10월을 살다 1934년 5월 4일 만기 출옥하여 △같은 해 1934년 10월 2일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털어 그날 나갔으니 부부 동거 기간 겨우 다섯 달. 김 의사는 1942년 7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으니 내외 한 이불 속의 삶이 겨우 33개월 뿐이었던 비참한 여인이다. ‘해로동혈(偕老同穴:함께 늙어 한 자리에 묻힘)’이 상식인데, 김춘배 부부는 서른세 달 살고 한 자리에 묻히지도 못했다.
△김구 선생 부인 최준례는 1924년 36세에 중국에서 종세하여 부부 겨우 18년 사셨다. 여기서 놓쳐선 아니 될 일이 있다.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는 같은 애국자이나 한 이불 속 부부는 남편 뒷바라지를 다하며 살다 경찰·헌병·검사 손안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은 가장 가까운 동지이건만 유공자 서훈에서 부인들을 제쳐둠은 인심이 야박함인가. 아니면 몰라 무지한 까닭인가.
김구 선생은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쾌거(1932년)가 있고 난 뒤에 현상금 60만 원이 걸린 수배자가 돼 복장과 이름을 바꿔가며 피해 살았다.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 중에 그를 따르며 돕는 자가 홀아비 김구 선생께 권한다.
“선생의 피신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김 선생은 홀아비이시니 나의 친우 중 과부로 서른 살 쯤 된 중학교 교사가 있는데 보시고 뜻이 맞으면 처로 맞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선생은 거절하고 해방 후 귀국해서 안두희 총에 맞아 가실 때까지 홀아비이었다.
△김춘배의 외아들 김종수(1927-2011)는 해방 후 열아홉 살에 홀로 고향에 찾아들어 숨만 쉴 뿐 고개 숙이고 살았다. 할아버지 닮은 큰아들은 의사요, 증조 신앙 따른 작은 아들 김경근은 목사이다.
삼례는 자존심이 강한 지역성을 지녔다. 부자-난 사람-지식인-종교인-교육자-실업인이 많다. 김춘배 의사를 외면치 말고 애국심을 발휘, 고인이나 산 사람들의 위상을 높여 나갔으면 한다. 같은 읍이라도 진안은 평양 출신 ‘이재명이 진안이씨’라 해서 동상을 세웠다. 수저 들어 밥 먹는 모습은 같으나 곳곳의 행의는 다르더라.
전명숙 1935년 서른한 살 청춘에 죽었다. 올해가 의거 90주년이다. 추모식! 김춘배기념사업회장(남상훈:010-3653-2032)과 기독교계에 기대를 걸어본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