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하여 보건대, 호남은 나라의 보루·장벽이었으니, 만약 호남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 없어졌을 것이다(竊想湖南 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1593년 7월 웅치·이치전투 1주년을 맞아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이순신(1545-1598) 조선 해군 삼군통제사의 글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함은 황박(1564-1592) 장군을 두고 하는 말로 장렬한 죽음이 생각나 하신 진담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웅치(곰치)대전 얘기 아는 분이 많고 △당시 전주성을 지킨 ‘이정란 충경공’을 추앙하고 있으나, 이 사실 앞에 빠뜨린 ‘알맹이’를 확실하게 밝혀둡니다. △웅치전투 여기 뚫렸습니다. △왜군이 안덕원과 용진 구억리까지 밀고 와 △‘구진리(寇進·陣里)-왜막실-황운리-세마천’ 전설이 있지요.
▲의주 선조대왕께 피맺힌 위의 사실을 알린 장군과 그의 글을 밝혀 둡니다. △서기2024년 2월 말 황양규 편저 『황하에서 장암까지(우주황씨 대관) 258p∼265p』의 ‘(2)죽봉 황박 공 유적사실’에 깜짝 놀랄 기록이 있습니다.
▲한자와 번역문에 △황박이 장계를 올렸고 △글 내용(원문)이 완벽합니다. △‘의병을 일으킨 황박이 삼가 올립니다.(熊峙與賊將…行在所 捷書有曰 倡義臣 黃璞謹奏以…)’이렇게 시작하여 △‘현과 도의 체계에 따라 삼가 글을 올립니다.’ 이 말로 마쳤습니다.
▲왕은 그 공을 표창하며 을 삼았습니다(上嘉拜 本道防禦將 公迎拜).
▲황박은 전주 만호를 하여 웅치·이치를 잘 알지요(황진=동복현감, 정담=김제군수, 권율=광주목사). 방어장 직책을 받았기에 후퇴나 패전은 생각 할 수 없었지요. 스물여덟 살 방어장은 이치(이현)에서 전사했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장가도 들지 않는데, 열 살 미만 두 아들(수억·수백)의 후손과 방손이 하나가 되어 박성일 군수에게 알리자 ‘완주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추모비를 세워 서기2022년 9월 19일 제막식을 거행하니(유희태 군수) 430년간 긴 세월 속에서 허공을 떠돌던 충혼이 비로소 안착했습니다.
황양규 씨 공력으로 황씨집안 문적이 들어나 『호남임진왜란사』가 제대로 서게 됐습니다. 박성일·유희태 군수와 황양규·황병주 외 그 후손·방손이 있어서 역사가 바로 잡혔습니다. 이분들에 대한 예우는 두고두고 종중의 몫입니다.
황박은 의병장→방어장→증 가선대부병마절도사→원종공신(原從功臣-최익현 글)→충신→정려(旌閭) 명을 받았습니다. 늦게라도 아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정려는 김제 용지면, 단소는 고산면 어우리에 있습니다. 구암사 배향 정씨들 빈자리에 황 장군을 모시면 어떨까요? 위패 ‘原從功臣忠臣黃先生神位’ 이게 혁신입니다. 역사의 숨결은 이어져야 합니다. 위패 모시고 술 한 잔 부어 올리기 어려운가요?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