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나선 의병 모두 이유가 있다. 1900년대의 자살자가 지금 정도이었다. 나라 망하는 이 꼴 보며 ‘더 이상 못 견디겠다’며 자결하였고, 피 끓는 청년들은 죽창 들고 나와 일본군에 대들었다. 이게 의병이다. “모이면 왜놈에게 항의 대들었으나 별 수 없었지(『高山誌』1권 40면 ‘謀擧義旅抗倭而不遂)’”. 나라가 망하자 교활한 왜놈들은 소위 ‘은사금(恩賜金)’이라는 명목으로 어른들에게 돈을 주었다. 이 무렵(1897-1906)인 1891년(40세) 진사에 합격한 운주면 금당리 윤자신(尹滋臣:1851년 생) 학자에게 ‘은사금’을 내렸다. 윤자신은 이 돈을 받지 않고 물리치며, 글로 써 이렇게 외쳤다. “△지금 이 돈 도대체 무슨 명목이냐? △나! 늙지(59세) 않았다(我非耆老) △늙은이도 아닌데 은사금이라니(非耆老恩賜也)! △나 궁한 백성 아니므로(我非窮民) △어려움을 돕는 돈일 수 없다(非恤金也). △이름도 없이 주는 돈을(賜之無名). △이름도 없이 받다니 △뜻도 없는 돈을…(無名之金) △군자로서 절대 받을 수 없다(君子不受). ▲차라리 이 몸을 죽여라(此身可戮). ▲이 뼈를 갈아버려라(此骨可碎). ▲이 뜻 가히 빼앗지 못 하리라(此志不可奪也).” 비봉(서면) 고흥유씨부터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렇게 외쳤다. 손자 윤구병(尹耉炳)의 생생한 증언이다. 완주 동서남북 어디서나 명사들의 얘기가 넘쳐난다. 남이 아니다. 이웃이다. 아니 자기 집안의 이야기이다. 의리의 집안 고흥유씨, 윤자신의 외침을 듣고 그냥 지나칠 씨족이 아니었다. 미꾸라지는 왜 괄시를 받나?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뭉쳐야 할 자리에서 뒤돌아서면 사람대접 멀어진다.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2000년대의 촛불집회…이 모두 젊은이가 해냈다. 젊은이는 나라의 만리장성이다. 의병 활동이 바로 만리장성 역할이라며 나섰다. 이런 힘들은 모두 어른들의 행의(行誼)에서 비롯했고, 윤자신과 고흥유씨 외 그 당시 많은 애국지사들의 ‘상호작용’↔‘우호관계’가 하늘을 움직이었다. 한국의 존립을 허술하게 보면 이게 바로 이적행위이다. 선조 때 군인과 백성을 함부로 많이 죽인 고산현감이 바로 신경희(申景禧)! 파직됐으나 현민들 이걸로 분이 풀린 건 아니다(『고산지』). 내월 유씨의 외손 조형승(曺亨承:1854년 생)은 1886년 큰 흉년이 들자 가난한 이웃들에게 구호 식량을 나눠 베풀자 당시 김봉규 현감은 ‘만인적덕 민불해산(萬人積德 民不解散:만인에게 덕을 베풀어 배성 흩어지지 않게 했음)’ 이렇게 써서 찬양했다(『고산지』 자선편). 비봉 청년들은 극단적인 위기에 죽창을 들었고 흉년에는 창고를 열었다. 이게 ‘비봉포란(飛鳳抱卵)’이다. 대치리 모정 옆 선정비를 보았으면 아는 대로 이야기하라. 천호성지에 백골을 모아드린 그 정성이 自由天地(자유천지) 사상이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종편집: 2025-06-24 03: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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