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강점기 중엽에 태어나 살아있는 사람마다 일본의→‘대일본제국 신민’, 해방 후엔→‘미 사령관 주둔지역의 속민(屬民)’, 대한민국 건국으로→‘대한민국 국민’, 6·25전쟁 북한군 점령 시절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민’이라 했으니 파란곡절 많았습니다.
먹을 게 없었지요. 대두박(大豆粕:콩깻묵)·안남미·누른 보리·꽁보리밥·시래기죽·풀떼기·강냉이죽·부대찌개… 맛·멋으로 먹은 게 아니라 죽지 못해 삼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쌀이 남는답니다. 그리하여 쌀농사 줄이라 하며, 창고엔 묵은 곡식이 넘쳐나 보관료가 골칫거리랍니다.
양쪽 모두 바른 외교에 선정(善政)이라면 남는 쌀 북한에 주고, 그곳 광물 들여오면 피차 좋을 터인데 이 일을 못하는 것으로 보여 농민들마다 짜증이 납니다.
겨울에 딸기·수박·오이·미나리를 공급하는 농촌의 천사. 전주천 벼룩시장 부녀자들과 눈 한 번 맞춰보세요. 공자(孔子)·증자·맹자·안자·노자·묵자…처럼 농민에게 ‘자(子)’자 붙여 불러줘야 합니다.
손가락이 휘었습니다. 그 손으로 우리 생명 지켜냅니다. 마음까지 고와 모래내시장에서 채소 팔다 아는 사람 만나면 그냥 주는 아주머님을 뭐라 부르리오.
옥자(玉子), 광자, 숙자, 민자가…아닙니다. 성인은 사람 정신을 바로 잡아줬고, ‘농자’는 생명을 이어줍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농자(農者)’는→농업을 말함이니, 농삿일하는 분은 농부·농군·농민·농업인이라 불렀지요. 이제 격(格)을 높여 ‘농자(農子)’라 해도 서운해 할 것입니다.
젊은이는 ‘지게? 지계?’ 이 구분도 어려울 것입니다. 초등학교 나와 진학 못하면 지게 업었지요. 나도 그런 사람. 외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습니다. 먼 산 나무꾼들 새벽 일찍 지게 지고 나갑니다. 온 마을사람 산에 모이면 긁을 가랑잎도 귀하니 소나무 밑동을 쳐서 까치집 만큼 짊어지고 와 멀건한 흰죽 한 그릇이 점심이었습니다.
이런 살림 중에 하루 세끼 먹기는 1973년부터입니다. 보릿고개 사라진지 50년인데 쌀 지천(至賤)으로 여기다니요. 하나님 노하실까 걱정입니다. 강태공은 땅을 놀려도 ‘도둑’이라 했습니다.
조반 안 먹고 오는 학생이 30%를 넘는다는데 ‘입맛이 없어서냐. 부모가 게을러서냐.’ 배부른 소리들 함부로 하지 맙시다. 한 끼 1,000원 짜리가 대학생에게 인기랍니다.
“오늘은 도시락 검사 날. 혼식여부 엄하게 조사하시오.” 학교장 말입니다. “교장 선생님! 이는 애들 인권 문제입니다.” 이러고 싶었으나 이랬다간 모가지가 열두 개라도 모자라던 시대이었습니다. 이말 한 마디 못하며 애들을 가르쳤으니 어느 학생이 ‘스승’이라 부르리까?
조강지처 이 소리에 남자들 엄숙해야 합니다. 부부 아끼며 먹을거리 소중한 줄을 압시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을 모른다고, 냉장고에서 썩어나가는 음식 없기를 바랍니다. 배고파 창자 꼬여 울어봐야 알겠습니까?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