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에서 구만리 주변 길을 다듬어 ‘회안대군로(懷安大君路)’로 한다니 반갑습니다. 회안대군은 아버지(태조)·형(정종)·아우(태종)·조카(세종)가 건국 초의 왕이니, 겉으로는 화려하나 1398년(34살)부터 1420년(56세)까지 22년간 귀양살이로 구만리에서 생을 마쳤고, 600년이 지나서야 초상화가 그려졌습니다.
△구만리의 대군을 완주(전주)에선 ‘왕’으로 대접했습니다. △묘소 ‘금상리(今上里)는 ‘임금 마을’이란 뜻이지요. △용진면(읍) ‘용진(龍進)은 임금 자리에 나간다.’입니다. △이 어른 소타기를 좋아하셔 호 망우당(忘牛堂)’입니다.
△고산면 어우리를 ‘어우리(御牛里)’라 더러 쓰는데 회안대군이 행차하셔 ‘어우리’로 봅니다. △‘밤소’는 회안대군 ‘밤에 소’타고 지나간 마을이란 뜻 아닐까요? △대군이 냇가에 이르러 물 깊이를 모르는데 마침 학들이 두 줄로 서있어 낮은 물길 따라 무사히 건너 ‘학다리’ 마을일 것입니다. △매사냥을 나가니 “여기서 더 못 들어갑니다.” 대군께서 “허허! 별꼴이야. 그럼 여기도 ‘감옥’이구만!” 이 말씀에서 ‘가목리’로 봅니다.
△봉동교 주변을 ‘마그내’라 함은 대군 내에도 못나오도록 금족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이를 ‘막근천(莫近川:냇가에 가까이 하지 마)’이라합니다. 이 ‘막근천’이→막근내→마그내…이렇게 불리지요. △만경강 물이 적어 ‘마른내’ 소리도 있었습니다. 서기1920-1930년대 저수지가 들어서 맑은 물이 벅차게 흘러 ‘맑은 내’가 됐습니다.
△경주이씨 구만리를 지나 선산 갈 때마다 ‘성덕(成德)이 하해(河海)같습니다.’ 이씨 촌 이래서 성덕리라 했고, 회안대군 자손들이 강 건너에 자리를 잡으며 ‘우린 평민으로 떨어졌다(落平)’하니 전의이씨·천안전씨마다 “아니요. 그게 아니요. 정신적으론 ‘보좌(寶座)에 앉을 금상(今上)’이로소이다.” 낙평리와 보상리 이름의 유래인 듯합니다.
△길 고치면 구만-성덕-낙평-보상-학다리-밤소-어우리-가목마을에 ‘오얏(李)나무’를 심읍시다. 공동묘지 자리에 시설물이 들어서면 ‘회안’ 두 자 넣기 바랍니다(懷安亭-懷安樓-懷安館). 와우산(臥牛山) 금산군 묘소에 대군 상징 소 조형물이 십상입니다. 전주·완주는 시중공파황강공·회안대군 후손이 전주 본향을 꿋꿋하게 지켜냈습니다.
△대군 물 깊은데서 뭘 줘 담으니 지나는 이가 ‘잘도 하시네요.’ 이 말에 이도 ‘다 슬기’일세. 하여 물 고동이 ‘다슬기’가 됐습니다. “대군 나들이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돌아가야 하나. 갈 곳은 오직 九萬里長天뿐이구나!” 이 한탄이 ‘회포리’입니다.
감농(생강)으로 좋은 밭이 돼 ‘양전(良田)’이고, 이래서 시호 양희공(良僖公)아닌가요. 김포금씨(金浦琴氏) 시제 때마다 가야금 연주를 합시다. 찬란한 역사 너머엔 눈물과 설움이 있습니다. 꽃길을 열어 갑시다. 인구 정책이 씨족의 존중입니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