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연고도 없는 지역에 흔쾌히 수 백 만 원을 기부하고, 스포츠 단체에도 수 천만 원을 후원하는 통 큰 기업인이 있다. 주인공은 바로 (주)와콘커넥트 장경하(49) 대표다. 장 대표는 이달 초 동상면(면장 이경아)을 방문, 400만원을 쾌척했다. 후원금은 독거노인 집수리와 저소득 아동 컴퓨터 구입에 사용됐다. 동상면에 따르면 장 대표가 당초 300만원을 기부키로 약속했지만, 후원대상자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100만원을 더 보탰다. 앞서 지난달 22일에는 완주군야구대표팀의 발전을 기원하며 2,000만원이라는 큰 금액을 후원했다. 내달에는 완주군유소년야구단이 훈련과 대회 참여 시 이동에 따른 불편함이 없도록 차량도 지원할 예정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기업의 이익을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환원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아름다운 포부도 밝혔다. 지난 12일 장 대표와 만나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인터뷰를 나눴다. ■ 잘나갔던 서울 생활 장경하 대표의 고향은 군산시 임피면이다. 2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부친이 전라북도 최초로 오토바이센터와 농기계센터를 운영할 정도로 유년시절을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군산에 초·중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는 형의 뒤를 이어 부산해사고로 진학했다. “형의 제복이 멋있어서 무작정 부산해사고로 가게 됐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보통의 경우, 10개월 동안 배를 타면 2개월 유급 휴가를 주는데, 무려 22개월이란 긴 시간동안 육지를 밟아보지 못하고 배만 타다보니 고향에 대한 향수로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결국 배에서 내려 군에 입대했고, 8개월 만에 하사관에 지원, 상무대에서 주특기 교육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고 새롭게 군 생활을 시작했다. 중사 전역 후, 서울로 올라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작은 술집을 차렸고, 하나하나 늘려갔다. 장사도 제법 잘되다 보니 전국에서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규모가 큰 나이트클럽을 소유하고, 서울 수유점, 노원점, 창동점 등 13개정도 지점을 운영했다. 술집 뿐 아니라 아웃소싱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대는 족족 대박을 터뜨리며, 20대 중반의 나이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맨몸으로 고향 내려와 햇수로 11년 동안 서울에서 생활하다 서른 살이던 2004년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유는 사업 부도였다. 589억에 피해자만 1300여명. 하지만 포기하거나 피하지 않았고, 피해자들로부터 합의서를 받아 검찰에 제출했다. “1289명 합의서를 제출하니 검사가 깜짝 놀라는 겁니다. 노력 덕분인지 벌금 1천만 원에 마무리가 됐어요. 물론 100%는 아니지만 변제는 다 했습니다.” 채무 변제를 위해 빌라, 주택, 나이트클럽 등 그간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한 뒤, 2200만원 상당 차량 한 대와 단 돈 5만원을 손에 쥐고, 고향에 내려올 준비를 했다. 그마저도 톨게이트비와 주유비, 밥값을 계산하고 나니 달랑 1만원 밖에 남지 않았단다. 하는 수 없이 자동차 매매상사에 가서 급매로 1850만원을 받고 팔았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시골로는 못가겠더라고요. 부모님에게도 창피해서 군산에 내려왔다는 얘기는 못했죠.” 그렇게 고향에 내려와 손에 쥔 돈으로 원룸을 얻어 1년 계약했다. 하지만 곶감 빼 먹듯 쓰다 보니 6개월이 채 못돼 바닥을 드러냈다. 하는 수 없이 원룸 주인에게 남은 6개월 치 돈을 달라고 사정을 하자, 두 달 치 제외한 나머지 4개월분의 돈을 받고 원룸을 나왔다. 나온 즉시 산으로 들어갔다. 2004년도 가을이었다. “죽기 싫어서 산에 갔어요. 아마 그때 동네로 갔으면 지금 저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너무 창피해서요. 잘 나갈 때 고향에 오면 형들과 호텔 잡아서 일주일동안 놀고 그랬는데, 망해서 오니 어떻게 동네로 갈 수 있겠어요.” ■ 다시 일어서다 장 대표는 산으로 들어가기 전 철물점에 들러 호미, 곡괭이, 삽을 샀다. 또 냄비와 버너 등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품도 구입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땅을 파 비닐과 낙엽을 깔고, 농약사에서 구입한 두꺼운 비닐로 지붕을 만드는 등 군생활의 경험을 총동원해 거처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 이후 주민의 소개로 아무도 살지 않아 폐허가 된 산 밑 어느 외딴집에 내려와 4년 동안 생활했다.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울산이 고향입니다. 저를 만나러 군산에 왔다가 잠깐 보고 갔어요. 그 뒤로 전화 통화만 한 번씩 하다가 제가 울산으로 데리러 갔죠.” 외딴집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당시 여러 후유증 탓에 우울증을 겪었고, 아내 몰래 우울증약을 지어 먹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부안 변산 내소사 직소폭포를 내려오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그때 아내에게 “나, 이 시간 이후로 열심히 살겠다”고 약속을 했고, 대우조선해양이라는 조선소에 입사했다. 설날과 추석 등 명절은 물론 토·일요일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명절에 친구들도 보고 싶죠. 하지만 남들 쉬는 날 일하면 돈을 4배는 더 줬으니까, 꾹 참았어요.” 이렇듯 돈을 벌기 위해 대우조선해양에서도 일하고, 강릉과 횡성, 서산, 당진, 여수 등 전국을 다니면서 냉각탑에도 올라가 목숨 건 작업도 많이 했다. “가장 높이 올라간 게 45m였어요. 끈 하나 의지하고, 제일 높은 냉각탑에 올라갔죠. 다른 사람들보다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서요.” 하지만 돈을 모을 만 하면 부친이 뇌출혈로, 뇌졸중으로 쓰러지거나, 어머니가 경운기 사고로 다치고, 장모님이 아파서 2박 3일 입원해 병원비나 치료비로 많이 지출됐다. ‘내 인생은 왜 이러지?’라며 세상을 원망하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다시금 마음을 굳게 잡고 고향 임피로 내려와 부친 밑에서 농기계 기술을 배우고, 농사도 지었다. ■ 인생의 터닝포인트 어느 날, 동네 선배로부터 화장품을 주로 하는 다단계 회사를 소개받았고, 돈도 벌었지만 결국에는 상위 사업자가 도망을 가 대신 제품을 회수해 물어줬다. 그 뒤로, 방문판매 등 돈이 된다는 것은 다 해봤다. 이후 터닝포인트가 된 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코인이었다. 부산 벡스코에서 부산시장, 정치인 등 VIP를 초청한 블록체인 관련 간담회에 참석해 정보를 얻고, 전문가도 만나게 됐다. 그리고 코인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트레이딩을 배웠다. 관련 다단계 사업으로 10억 넘는 큰돈도 벌었지만 얼마 못가 회사 대표가 사기 혐의로 구속되고 20년이 넘는 징역을 선고 받는 사고가 터졌다. “합법인 줄 알았죠. 뉴스에 나오고, 그때는 죽고 싶더라고요.” 하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믿고 사업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갖도록 하기 위해 돈을 나눠주고, 서류 등을 꼼꼼히 준비한 뒤, 청와대를 비롯해 국민권익위, 대검찰청 등에 제출했다. “책임을 지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져야죠. 돈이 없으면 무릎이라도 꿇고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하고요.” ■ 기부로 지역사회와 함께 큰 사건 이후, 장 대표는 (주)와콘넷과 인연이 돼 3년째 이끌어오고 있다. (주)와콘넷은 공유경제플랫폼IT기업으로,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현재 전주에 본사의 지원과 자신의 사비를 보태 180평 규모의 지사를 마련했고, (주)와콘커넥트라는 법인이름으로 IT사업 외에 사회공헌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 장 대표는 지난 11일 완주군야구대표팀의 발전을 위해 2천만원의 후원금을 전달했고, 동상면에 독거노인 집수리와 저소득 아동의 컴퓨터 구입을 위해 400만원을 지원한 바 있다. 또한 지난 2021년 11월에 창단한 완주군유소년야구단에 지금까지 훈련과 대회 참가 때 마다 지속적으로 후원해오고 있다. 다음 달에는 아이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차량도 지원할 예정이다. 완주지역 외에 전주와 군산, 익산 등 도내 시군을 돌며 매달 300만원이 넘는 성금과 백미, 라면 등 생필품을 기부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사회구성과 소외된 약자를 위한 기부를 이어가는 그의 선행실천이 귀감이 돼 지난해 제5회 대한민국을 빛낸 13인 대상 중 수훈부문 블록체인대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기쁨을 안았다. ■ ‘고마운 사람’이 되고파 지금의 장 대표가 있기까지는 하루 16시간이 넘게 몸이 부서져라 일하며 가정을 돌볼 정도로 고생했던 아내 손지혜(43)씨의 노력 덕분이다. 때문인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11년 만에 낳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민호(7)군에게 장 대표는 ‘백성에게 호의를 베풀어라’라는 이름의 뜻처럼 앞으로 성장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운 사람이 되길 간절히 소망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부모 형제에게 한 푼도 주지 못했던 게 너무 마음이 아프고, 가장 후회가 됩니다.” 이십대 때 500억이 넘는 큰돈을 만져보며, 돈이 최고인 줄 알고, 우쭐대고, 과시하고, 젊은 혈기에 주먹을 함부로 휘두르다 죽을 고비를 세 차례나 넘겼다는 장경하 대표. 수도 없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롤러코스터와 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됐단다. “지난 날 후회되죠. 그래서 더 많이 기부하고, 남을 돕는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죽을 때까지 남들에게 ‘고마운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그의 아름다운 선행이 회사의 도약과 성장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며, ‘기부 천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간절히 소원한다.
최종편집: 2025-08-09 18: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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