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하면 곧 따르는 두 마디 . 어느 말이 맞는가.
고산 읍내에 사진관이 있었고, 예쁜 여자 가장 많이 바라보는 사람이 사진사이었다. 삼발(삼각대) 위에 올려놓은 사진기 뒤에서 검정 보자기(안은 붉은 색)를 뒤집어 쓴 채 렌즈를 조절하며 ‘고개 이러라’, ‘손 저러라’ 시키면서 ‘장미 같네요.’, ‘귤 같네요.’ 농담 실컷 하며 들여다본다.
전주시내 어느 사진사는 ‘처녀만 좋아한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설·추석 명절이면 마을 처녀들이 합사진(合寫眞)을 찍으려고 줄져 사진관을 찾아들었고, 원판 수정 예쁘게 해 달라 부탁하며, 언제 사진 나오나 확인한 다음 찾으려 또 다시 온다. 한 번 만나 두 번 만나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사진사는 회갑잔치, 초례청, 돌잔치에 불려가 출장비 받고, 잘 얻어먹으며 사진 값이 비싸 논 100마지기 농사보다 낫다고 했다. 김병수 어버님과, 고 아무개 사진관은 1년 내내 붐볐다.
고산중 이운섭 선생도 사진기가 있어 도민증 내던 시절에 마을 돌며, 증명사진을 찍었다. 선생의 동생 이강은은 삼기정자 아래에 사진관을 차렸다. 졸업사진 많이 찍었고, 초·중교 소풍이나 수학여행에도 빠짐없이 따라다녔다.
필자는 1942년 초등학교 입학하고 첫 사진을 찍었다. 당시 사진관이 읍내 윗삼거리에 있었으나 상호·주인 이름을 잊었다. 사진관엔 옷, 빗, 모자, 알 없는 안경 등 소품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인데 성당 나가는 사진사가 있었으나 적어 둔 게 없고 물어볼 사람도 줄어 무척 아쉽다.
성명 잊은 분도 많다. 상삼기 강윤형(강성형 장형)은 외국에서 사진술을 익혔고 들어 올 때 사진기를 가져왔다. 일정시대 얘기이다. 이처럼 인기 있는 직업이 사진사이었다.
지금은 모두 사진사다. 핸드폰이면 못하는 게 없다. 녹음까지 되며 사진 ‘찍었다-지웠다’ 자유자재다. 이러니 사진관 사라졌고, 혹 있다면 ‘노포(老鋪)’로 구경거리다.
기린리 황재남은 전업사진작가로 전시회를 통해 완주문화를 한층 드높인다. 10년∼50년 후엔 가치가 더 높아져 고산지역 우러러 보일 것이다.
액자 장사도 잘 되던 때가 있었다. 안방 벽에 가족사진 빼곡히 걸어 놓았고 학사모(學士帽) 쓴 어머니 사진부터 설명 없어도 재미나는 사진이 많다. 고산면사무소 안벽에 확대된 사진마다 고산역사를 말해준다.
졸업앨범을 펼쳐보면 희비가 엇갈린다. 고인 된 벗이 있고, 짝사랑하던 여자 친구 몰라보게 늙어간다. 그래도 정은 여전해 이래서 사진이 좋다. ‘순이야!’ ‘숙자야!’ 부르며 저 혼자 얼굴을 붉혀 본다. 뒷모습도 예쁘다.
사진이 삶의 역사다. 앨범을 펼쳐놓고 10년∼30년 전을 되돌아보며 혼례식 사진이나 어릴 때 사진을 통해 식어가는 정을 되 일으켜보자. ‘진사’, ‘찍사’를 아는가.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