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마을이 함께 아이의 꿈을 찾아 키우는 행복한 완주교육』을 일궈내겠습니다.” 이 글에 호감이 가 교육장 성명을 찾았으나 ‘제가 못 찾는 건지 성함을 아니 올렸는지 몰라’ 그냥 ‘교육장님’이라 글을 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고산초등학교에 가보셔서 아시겠지만 가 있습니다. 귀물(貴物)이지요. 그런데 이 귀물이 연못 가운데 있어 가까이 가지 못해 김준기 박사 시(詩)도, 당시 임원성명도 협찬자도 알 수 없습니다.
어른도 이러거늘 학생들은 먼 산을 바라보듯 돌만 보이지 비문 알 방도가 없지요. 어찌 보면 상식 밖의 일입니다. 저 업무 주체는 모르나 학교에 비가 있고 관청 이름 “교육‘지원’청”이라니 한계를 살펴서 비를 밖으로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하는 데는 ▲학교냐? 동창회냐? 교육지원청이냐? 깊은 생각을 좀 해주시기를 빕니다.
▲‘자리 옳지 않다.’ 공감을 하시면 교육장님께서 바로 잡아주세요. 학교 돈이 교육청 돈, 교육청 돈은 국민(학부모) 돈입니다. ‘어두워 틀린 사실을 바로 잡으심이 교육’입니다. 고산 사람들 유독 비석을 소홀히 합니다.
▲고산초등학교 개교 당시의 교장(일본인)공적비가 있었지요. 해방이 되자 이 비석을 시키는 대로 제 손으로 땅에 묻었습니다. 1960년대 제가 교사 시절 제 손으로 파 올려 한 구석에 다시 세웠는데 지금 찾아보니 없어졌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현청(縣廳) 군청(郡廳)이 있었던 때의 거사비(去事碑, 去思碑:고산과 연관 있는 분의 비)가 읍내에 많았습니다. 6·25전쟁 때 면사무소가 불에 탔고 그 후 빈터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팔려갈 때 어디론가 옮겼다가 모두 없어졌습니다. 봉동 윗 장터 비석군(群)이나 삼례도서관 마당의 비석을 보시면 짐작하시기 쉬울 것입니다.
전주시내에 전라감영 건물을 세우고 다가산 아래(신흥고 앞) 비석들을 옮겨 왔는데 여기엔 을사조약(1905) 5적, 정미조약(1907) 7적, 나라 팔아넘긴 국적 ‘이완용’ 비석과 그의 양아버지 이호준 비도 있습니다.
서울 한국은행 구 건물 머릿돌 ‘정초(定礎)’ 이 두 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글씨지만 1000만 시민들 그대로 두고 봅니다. 이게 역사입니다.
존경하는 교육장님! 땅 바닥 비석을 물속에 옮겨 세운 그 생각 한국인 맞을까요? 경주 천마총을 발굴하여 유물 전시하는 판인데 너무했습니다. 당시 학교장이 말렸어야 합니다. 그 분들 탓할 게 아니라 현명하신 교육장님께서 바로잡아주시면 그 업적 1000년 갈 것입니다. 큰마음 한번 써주세요.
이 글을 보신 직원은 교육장님께 보여드리세요. 세월호 큰 배 무거워도 끌어올렸습니다. ‘칼럼 800호 특집’입니다. 기쁨 보여주세요.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