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놈 발가벗고 30리 간다.’ 왜 이런 소리를 들었을까? 1914년까지 고산읍내에 군(현)청이 있었고, 죄인 잡아다 치거나 주리를 틀면 그 비명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일꾼들은 논밭이나 산으로 빠져나가면 그만이었지만 선비들은 귀를 막을 수밖에 없어 봄·여름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가 바구니와 낚싯대를 메고 평상복 차림으로 냇가에 나가 낚시질을 하며, 물 따라 고기 따라 어우리→장기리→마그내(맑은내)→성덕 앞까지도 갈 수 있었고, 이를 본 봉상 사람들마다 못 마땅해 ‘어어어 저저저런! 이럴 수가…! 고산 놈들 발가벗고 30리 간다.’ 이렇게 하던 말이 오늘에 이른다.
실은 낚시꾼 간편복(簡便服)을 두고 한 말이다. 만경강 부분 이름에 ‘고산천(高山川)’이 있고, 봉동 성덕·고천리 앞까지를 가리킨다.
고산현청 형방(刑房)은 소송·형옥·법률·노비에 관한 일을 맡아 봤는데, 백성의 송사(訟事), 치죄(治罪:죄를 다스림) 과정에서 매를 들었고, 50장(杖) 100장 볼기를 치면 ‘아이고’ 소리 절로 나와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고산향교가 ‘큰 정자나무 근처 어덕마을에 있었는데 매질 소리가 듣기 싫어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한 고산 사람들은 ‘…발가벗고 30리…’ 이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주민이 아니라 ‘봉동 놈은 발가벗고 탱자나무 사이로 30리 간다.’ 이렇게 맞받아쳤다.
양쪽 말 가운데는 ‘뻔뻔하다’, ‘당돌하다’, ‘담대하다’라는 뜻이 깔려있다.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그 놈을 처라!’ 이 때 쓰던 매에는 육모방망이 외에 ‘참나무’, ‘사꾸라(벚나무)나무’, ‘박달나무 몽둥이’가 있었고 이로 후려치면 견뎌낼 장사 없었다.
주리를 틀고 인두로 입을 지지는 고문도 했다. ‘인권 침해라고?’ 말이야 옳지만 때리면 맞지 않을 수 없었다. 매 맞은 여독을 풀려고 똥물을 마셨는데 약이 됐나 더 연구해 볼 문제이다.
고산에서 매질하던 동네를 ‘관동(官洞;관청동네)’이라 했고, 그 뒤편 마을은 ‘볼 관 자(觀)’자 관동(觀洞/소남동)이 있다. ‘관청에서 뭣들 하나 내려다보는 마을’이란 뜻이다.
물 건너 망북정(望北亭)은 ‘북쪽을 바라본다.’는 뜻이나 여기 모인 선비들은 술을 마시며 시를 읊지만 ‘관청의 동태를 살펴’ 여론화했던 곳이었다.
지금 고산·봉동 사람들 모두 온유하고 수준이 높아 꼬집고 꼬는 말을 하지 않아 다행이다.
봉동문화의 최고 자랑거리는 구 장터의 거사비(居思碑)와 봉동초등학교의 비석들이다. 봉동교 근처 소나무 안내 표지석과 봉동읍 미래향방을 새긴 자연석 역시 오래 갈 자랑거리이다.
봉동 읍민의 날에 찬사를 보낸다. 구 장터에 세운 새 정자에 ‘紆州樓(우주루)’라는 현판이 걸리면 봉동 더 높아진다. ‘떡메떡’을 먹어봐야 진짜 完州人이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