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청년들은 학력과 관계없이 지식수준이 매우 높으며 민주주의시대라 할 말 하고 산다. 각자 맘속 큰 뜻을 드러내라. 세계2차대전 전 태어난 사람들은 배운 게 적고 ‘침묵은 금’이라며 젊은이의 말을 억누르던 편이었다.
남 헐뜯음이 아니라면 당당하게 입을 열 되, 힘이 부치면 동지를 모아 함께 외쳐라.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단다. 논리에 맞으면 먹혀들어간다. 주저하거나 포기하면 남들은 그 속을 모른다. ‘우는 얘 젖을 준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호랑이를 잡을 듯이 덤벼들어야 고양이라도 붙든다. 주변사람이 ‘똑똑하다’하면 고맙게 받아들여라.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 김대중 선생은 ‘행동하는 양심’, ‘인동초’를 알기 쉽게 설명하더니만 대통령을 하였다.
대원군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때 어느 청년이 운현궁을 찾아가 절을 하자 눈길도 주지 않는다. 청년은 세상에 ‘이럴 수가…!’ 언짢았으나 꾹 참고 지혜를 짜내 절을 한 번 더 했다. 대원군은 그제 서야 “자네 나 죽었나? 절을 두 번이나 하게…”. 청년은 “합하! 그게 아닙니다. △처음 절은 왔다는 인사이었고 △이번 절은 간다는 뜻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 때부터 얘기가 터져 나와 모두 호걸 소리를 들었다.
충청북도 괴산군 박온섭(1940년 생) 옹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 1995년 충북도의회 의원에 당선(55세)됐다. 그런데 주목할 일이 있다.
▲큰 형은 월악산·청화산에서 활약한 빨치산!(109p) ▲누나와 매형은 문경에서 좌익운동! ▲아버지는 식구들과 청주형무소 생활을 했음에도 박온섭은 고향을 지키며 괴산향교 전교 등등 여러 일에 앞장을 서 소통했다. 2021년 11월 『정민 박온섭(晶民 朴蘊燮) 연설 및 기고 보도집』을 펴냈다.
‘…산 높고 골 깊은 곳에 사니(山高谷深在-산고곡심재)/ 어디에 사람 있나 누가 알아주랴(何處有知人-하처유지인)’ 솔직하고 뜻 깊은 표현이다.
기도형(1960-1989) 시인 어머니는 아들이 쓴 이 시 한 수밖에 모른다. 이는 장사익 소리꾼이 노래로 부른 덕에 들어서 외웠기 때문이다. 왜 이랬을까. 어머니는 한글을 몰랐다. 이리하여 고장 문해(文解)교실에서 1년 반 한글 공부를 마치고서야 『기도형 전집』을 읽고서 아들을 알았다.
비봉 이전 출신 이존화 국회의원의 등 뒤에서 여인들이 “난 처음도 찍었으니 이번에도 또 찍을래!” 그러자 그 옆 친구가 “지난번은 안 찍어 속으로 미안했는디 이번에는 나도 찍어줘야 허게꼬만!” 유권자의 마음이 이처럼 스스로 돌아서게 해야 한다.
봉동·비봉 주민은 추렴하여 기념비를, 완주 동지들은 모금을 해 청렴추모비를 세웠다. 주민들의 민도·온도 차이도 분명히 있다.
젊은이는 무얼 끄집어낼까 머리를 굴려야 하고, 한번 물으며 놓지 않는 진돗개 기질을 가져야 한다. 남의 마음을 살 줄 아는 포근함을 그침 없이 풍겨라.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