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선 동무! 이 물 알겠지요.”, “…‥”. “강 대장님! 저 산봉우리 알겠습니까?”, “…‥”. “팔로군 동지! 저 바위 생각나지요?”, “…‥”.
강철선은 한유모 물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이 차창 밖 풍광에 빠져있을 뿐… 자동차가 곧 시골 교회 마당에 들어섰고, 두 사람은 내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큰길가 언덕에 나란히 섰다.
천주상 목사는 찻소리와 인기척에 ‘누굴까?’ 살피다 양인 곁으로 다가서니 두 사람도 몸을 돌려 세 사람은 얼굴을 마주했다. 반백들은 한참동안 ‘세상에 이런 일이…!’
마주보던 천주상 목사가 먼저 두 사람 팔을 끌어 사무실에 들어섰다. 세 사람은 43년 전 어떤 사이였나.
1950년 6·25 한국전쟁 중 동상면 신월리 명지목. 당시 강철선(30) 유격대장은 한유모(20)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천주상(20)을 쏘란다.
한유모는 “대장님! 잠깐만요. 당돌한 행동이오나 대장님 저를 먼저 죽여주세요.” 권총을 넘겨받은 강 대장은 숨을 크게 몰아 쉰 다음 “좋다. 니 말대로 해주마. 그러나 이유는 말해야지.”
“대장님! 지금 입장이 달라 천주상은 저쪽, 저와 대장님은 같은 편이나, 천주상과 저 한 어머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우리 엄마 저를 낳고 석 달 만에 죽자 그 부모님이 대발에 싸 묻어주었고, 천주상 어머님은 저에게 젖꼭지를 물려 본인 아들과 함께 기르셨습니다. 우리 둘 이런 관계인데 제가 어떻게 그의 머리에 총을 쏘겠습니까?”
그러자 국군과 경찰이 일시에 밀어닥쳐 빨치산 대장은 대원들에게 후퇴명령을 내렸고, 그때 강철선 대장은 “야! 니들은 따라오지 마. 알았나!” 이 소리를 들은 후 43년만의 극적인 만남이었다. 강철선은 북으로 넘어 갔으며 그 후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 10년 감옥생활에서 풀려난 지 반년만의 만남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강철선은 한유모에게 “그 날 그 절박한 상황에서 뭘 믿고 그토록 당돌했나? 나 평생 의문이라.” 물었다.
한유모의 대답 “10월 28일 식량사업에 나섰던 날 밤 맨 앞에 내가 섰고 바로 뒤에 강 대장이 따랐습니다. 종암 성황당을 지나며 돌을 주어 얹으니 강 대장도 저처럼 했지요. 이 때 고운 맘씨를 직감했습니다. 권총을 넘겨주는 순간 성황당 생각이 번쩍 떠올라 죽기를 각오하고 그랬습니다.”
강철선은 한유모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손길이 바르르 떨렸다. 천주상 목사는 “저의 아버님(천지인)께서 ‘여기 땅 50만평은 은인을 만나 요긴하게 써라.’ 하셨습니다.”
헤어질 녘 천 목사의 기도 “…사랑하는 맘 아끼며 삽시다. 모진 마음 달래며 삽시다. 외롭고 슬픈 마음 되도록 위로하며 삽시다.”
국토분단이 전쟁→휴전협정 1953년! 아주 오래 됐으나 전쟁의 비화를 털어놓기 아직도 어려운 세상이다.
강철선-한유모는 천주상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라 새재에 오르니 봉실산 저녁노을이 오늘 따라 유독 아름답다. 통일과 평화를 기리는 글이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