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회를 다니기에 서로 얘기하는 사이지만 금전거래는 없었다. 고 권사가 “황 권사! 미안한 말 한 마디…”. “나 300만원만 빌려줘. 이자 잘 챙겨드릴게.” 황 권사 머뭇거리며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이런 부탁했나!’ 후회하는 듯 한 기색이다.
황 권사 여유 있는 살림이 아니나 300만원을 마련해줬다. 이자 꼬박꼬박 주더니만 고 권사 어느 날 “황 권사가 황 권사 이름으로 은행에서 300만을 대출받으면 은행 이자 내가 내리다.” 대꾸하기 어려운 얘기다.
황 권사의 대답 “번거롭게 하지 말고 한 달에 10만원씩 30번만 주시요.” 이 선에서 타결 되고 30년. 2022년 6월 26일 고 권사가 황 권사에게 봉투 하나를 쥐어줬고, 집에 와 펴 보니 10만원.
그 당시 고 권사 남편 별 벌이가 없었으며 딸 둘이 서울 Y대학교에 다니는데, 가난의 절벽 앞에서 빚내는 길뿐이었다. 절박한 위기에서 거래가 이뤄졌고, 채무자는 ‘쥐구멍에 빛 든 격’이었다. 두 딸 무사히 졸업을 하여 곧 배필을 잘 만나 넉넉하게 살며 친정부모 극진히 봉양한다.
황·고 양 권사 나이도 곧 90…. 고 권사는 견뎌온 세월, 꾸려나온 살림살이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리하여 ‘초복 오기 전에…’ 봉투 하나를 만들어 건넸다.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황 씨의 남편 “당신도 무얼 좀 해 줘야 하지!” 양인의 주름 진 눈가에 미소가 짚고 넘어간다.
S는 1950년대 서울 청량리 어느 민가에서 당시의 말로 양ㅇ주(洋ㅇ主)한데 1000원을 받았다. 그러나 성도 이름도 모르며 다만 또래로 생각날 뿐이다. 이런 덕에 S 공부하여 글을 쓰나 그렇다고 1000원 한 장 나오는 건 아니다. 그럴수록 그 1000원 잊을 수 없다.
국종인은 홀아버지 봉양과 요양원 의료비로 어려운 살림 쪼들리는데도, 제 친구 아버지 S씨가 병환 중이라니 복탕과 통닭을 사 보냈고, 받은 병객 과분해 눈물 섞어 넘겼다.
S는 20살 아래 ‘김춘배 의사의 손자 김경근 목사’와 식당에 가는 경우 칼국수·콩국수를 넘지 않는다. 김춘배 독립투쟁 중 밥을 보면 두 그릇씩 먹었다. 여러 날 굶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체하면 죽는다. 소화 안 되면 숨 거둔다. 독약이 될 수 있다. 이 일을 생각하며 양인은 가볍게 한 끼를 한다.
고향에 들리니 하지감자 넣은 칼국수 해주시던 존경하는 부인이나 그 며느리도 갔다. 과거를 한 번쯤 더듬어보라. 모진 데 없고, 순하며, 조용하면서 포근한 인심이 ‘완주 사람’의 바탕’이다.
고산 제1갑부 고갑준은 1,200석꾼. 그 손자 고병락 선생을 따라가 안방에서 겸상 했던 그 일 내 생애 최고의 자랑거리다. 남은 세월 은혜는 은혜로 갚자. 콩 한 쪽으로라도!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