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380년 이성계 장군이 운봉에서 왜구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길목 전주에서 오목대 잔치가 벌어졌다. 당시 직제학(直提學) 최용갑(崔龍甲)은 음식을 잘 차려 군사들에게 배불리 먹여 편히 쉬게 하자 이성계의 답례 “최용갑 직제학은 호남의 ‘갑’용(‘甲’龍:으뜸용이란 뜻)’ 틀림없군요. 고맙습니다.” 최용갑의 대답 “제가 감히 무슨 ‘용’이라니요. 큰일 날 소리… ‘갑추(甲鰍:큰 미꾸라지)’도 못됩니다. 장군이야 말로 이 세상의 ‘신선한 아침(朝鮮)’이심을 좀 짐작할 뿐입니다. 제 생각 맞을 날이 꼭 올 것입니다. 큰 싸움에서 이기고 좋은 자리이오니 푹 쉬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절호의 기회이니 애들이나 소개하렵니다.” “△이 애 이백유(전주:후에 개국3등공신)는 제 외손자요 △여기 황거중(우주:원종공신)은 제 처조카이며 △그 옆 심효생(부유:개국3등)은 제 이질이고 △여기 오몽을(보성:1등공신)은 제 조카사위입니다.” 이성계 “아! 그래요. 부럽습니다. 이 훌륭한 인재 좀 나눠 주실 수 없을까요?” 최용갑의 대답 “하하하…나누다니요. 다다익선 다 가져가신다 하실수록 저나 본인들 호남의 영광입니다.” 이성계의 화답 “직제학! 대단하군요. 우리 노래를 부릅시다.” 일어나 춤을 추며 대풍가(大豊歌)를 불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정몽주는 시국의 흐름을 짐작하고 속이 터져 빠져나와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슬피 울며 시를 읊었다(바위에 새겨있음). 개성에 돌아간 이성계는 최용갑의 오목대 얘기를 잊을 수 없었다. 1388년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개경에 들이닥쳐 최영을 귀양 보내고 결국 죽이자 정도전(鄭道傳)이 충청도를 평정, 탄탄대로를 닦아 이성계는 결국 오목대 잔치 후 12년만인 1392년 왕관을 썼다. ‘1·2차 왕자의 난’ 얘기는 건너뛰고, 황거중(黃居中)은 정당문학과 두 곳의 전서(典書)를 지냈으며, 처신을 잘 하여 4남(기, 육, 균, 견) 2녀(사위:안희덕, 유습)의 아버지로 장수 많은 걸 남겼으며, 본향 장암 정침에서 천수를 다 하였다. 묘는 비봉면 내월리에 있고, 재실이 삼치재(三致齋)이다. 본관이 우주(紆州)! 존대 받아야 할 완주의 고귀한 원주민이다. 그 자손들은 익산-군산-김제-전주에 많이 살고, 왕궁면 ‘장암(場岩)’ 그 이름 예사롭지 않다. 금마와 삼례 사이 장암은 한양과 전라남도 손님들이 거치는 마을로 여기 황거중 집안에서 먹고 자고 쉬어가며 노자도 받아가 서도장씨-홈실박씨와 함께 호남의 인심 좋은 황씨 마을이었다. 손님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 마당처럼 된 바위라서 얻은 이름이 장암 아닌가? 황거중의 고모부 최용갑은 고려의 앞날을 꿰뚫어 보았다. 이 정도는 돼야 정치인 소리 듣는다. 처가 외가 잘 돼야 하고, 자기 씨족을 빛내야 거물이다. 완주가 곧 우주(紆州). 장암은 ‘뉘 집 마당 바위’일까? ‘황씨 마당 바위?’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종편집: 2025-06-24 03: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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