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에서 근·현대(100년 안팎) 인물 중 그 으뜸은 단연 윤건중(1897∼1987) 선생입니다. △봉동 우산에서 태어나 △청년시절 예수를 잘 믿었으며(전주서문교회) △3.1운동 이후 독립 자금을 듬뿍 내었고 △경찰이 뒤를 쫓자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이 됐습니다. △‘배워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 따라 독일에 유학 경제와 경영학을 전공했지요. △지명수배 시호가 끝나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독일서는 알아주는 학식이었으나 봉동 생활은 외로웠습니다. △이래선 아니 되겠기에 농민들을 만나 ‘생강조합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작인마다 “그게 뭔디유?” 이랬습니다. △윤건중의 대답 “부자 되는 길! 물품 창고로 가져오면 생강 값 많이 받는다.”고 쉽게 설명했습니다. △가을에 약속대로 했습니다. △이게 ‘봉상산업조합’이지요. 조합원과 생산량이 늘어 북한까지 올라갔습니다. △조합원은 점차 부자가 되고 딸 혼인 때 재봉틀을 사 보냈습니다. △삼례 살며 자전거로 출퇴근했습니다. △인정 많은 조합원들이 ‘월급을 준다.’고 하자 그의 대답 △“나 그만두라는 말이냐?”물었습니다. △조합원은 ‘동상 세우기’를 결의했지요. △일제는 민족 운동자를 거북하게 여겨 이 일을 방해했습니다. △일본 망할 기미가 훤히 보이자 토지개혁까지를 생각, 논을 작인들에게 팔았지요. 곧 8·15 해방을 맞았습니다. △농민만을 생각하던 윤건중은 군산에 농기구공장을 차렸으나 농민들마다 기계 살 돈이 없었고, 곧 6·25전쟁이 터져 빈털털이가 됐습니다. △세상 이기는 재주가 없어 전주남노송동에서 셋방살이를 했지요. △이때 경무대에서 올라오라는 기별이 있었습니다. △등산모에 단꼬쓰봉, 실로 얽어맨 안경을 쓰고 서울역에 내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임자 나 좀 도와야겠어. 농림부를 맡아주게나” △그렇게 농림부장관이 됐습니다. △국회의원 200명을 보니 출신-학력-경력-꼴이 아니네요. △“농민 잘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농민 잘 살리려면 쌀값 올려줘야 합니다.” 당연한 말인데도 △도시 출신 강골들이 “각하! 이 어려운 때 쌀값을 올리라니요.” △윤건중 농림부장관을 쪼아대어 결국 두 달도 못 채운 채 “임자! 좀 쉬어야겠어.” 밀려났습니다. △전북대학교 독일어 강사도 오래 못하였고… 봉동 율소리에 사셨습니다. △둑 넘어 냇가 둔치의 자갈을 치우고 작물을 길렀습니다. △호미자루 괭이자루 무거워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였고 △고산면 소향리 딸네 집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가련한(?) 시신은 고산성당에서 발인 미사를 열어 대전현충원에 모셨습니다. 선량한 완주군민들 돌로 된 기념물 하나(6천만 원 예상) 세워 주지요. 만경강 이북에서의 최고 인물이 확실합니다. 농협조합원과 중견 정치인들이 앞장을 서기 바랍니다. 봉황의 뜻을 누가 알리요? 앞장 설 분 누구지요?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종편집: 2025-06-24 03:40:07
최신뉴스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오늘 주간 월간
제호 : 완주전주신문본사 :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동읍 봉동동서로 48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전라북도, 다01289 등록(발행)일자 : 신문:2012.5.16.
발행인 : 김학백 편집인 : 원제연 청소년보호책임자 : 원제연청탁방지담당관 : 원제연(010-5655-2350)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학백
Tel : 063-263-3338e-mail : wjgm@hanmail.net
Copyright 완주전주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