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자 형부 어젯밤 초포다리(소양교)에서 죽었디아.”, “왜?”, “왜는 무슨 왜? 술 마시고 오다 그랬겠지!” 맞다. 희자 형부는 퇴근길에 술 몇 잔을 마셔야 발걸음이 가벼웠다. 주막에서 일어나 초포다리까지는 그럭저럭 잘 왔다. ‘조심조심 건너야지!’ 다리 난간을 잡고 발을 슬슬 밀어 가운데 쯤 왔을 때 어! 앗! 뚝! 쾅! 냇바닥에 떨어져 버르적거리다 숨을 거뒀다. 6·25전쟁 중 성한 게 없었고, 다리 난간 쇠붙이를 떼다 팔아먹던 시절의 얘기이다.
화산 3거리에서 소재지까지 여섯 개의 다리가 있는데 여름철 큰 비만 내리면 죄다 떠내려갔다. 추수 후 수득세(收得稅), 상환곡 현물을 싣고 나서면 다리 없는 냇바닥으로 내려가 건너편 언덕배기를 밀어 올라야 했으니 사람·소 땀을 뻘뻘 흘렸다.
1950년 한국동란! 뒤엉켜 잔인하게 싸울 때 이틀 밤 고산 삼기교에서 또드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아침에 나가보니 중간부 상판이 내려앉아 고산 5개면민은 물론, 진산·금산 사람까지도 고생을 했다.
이서 출신 유범수를 다리군수라 했다. 5·16군사 쿠데타 후 전역(중령)을 하고 정읍군수를 거쳐 완주군수가 됐다. 고향에 오니 신바람이 나는데 다리 없는 개울이 많다. ‘바로 이거다!’ 다리 놓기에 주력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동네 다리도 놓아 주시요.” 수첩에 받아 적었다.
실은 돈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자갈, 모래, 철근, 시멘트와 기둥 거푸집이면 곧 완성됐다. 통학생 주민 모두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 별명이 ‘다리군수’. 본인은 한 술 더 떠 ‘多利郡守’라 자칭했다.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걱정되는 쪽에서 쏘삭거려 고창군수로 보내어 부임하자 술은 전북에선 마시질 않고, 광주로 갔다. 여기는 고등법원 등 고위직 공무원이 많아 ‘전북 군수 술집에 들어가는 것쯤’은 얘기 거리가 아니 되었다.
중앙에 손을 뻗쳐 최영두(소장) 현역을 물리치고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소양 용연 분들이 세운 유범수 공적비가 황운리에 있는데 자리가 좋지 않아 유해광 소양농협장에게 말을 하니 ‘곧 맘에 드는 면장 올 것 같다’며 그 때까지만 기다리잔다.
봉동교는 국회의원을 떨어뜨리고 당선시키는 다리이었다. ‘다리 놓겠다. 공약했다가 못 지키면 다음 선거에서 쓴 잔을 마셨는데, 이존화 의원이 이 일을 해냈다. 우선 봉동 주민마다 ‘똑똑하네!’ 호평을 하자 고산 5개면민은 영웅시했고, 제4대 의원에 거뜬히 재선하여 국회 문교분과위원장과 자유당 조직부장에 올랐다.
전주 싸전다리 아래는 서민(노인)들의 천국이었다. 장기·바둑을 두며 술잔을 돌리는데 결국 쫓겨났다. ‘환경이 좋지 않다고…’ 임용진 아버지 이름이 ‘임철교’. 아이들마다 ‘한강철교’, ‘금강철교’, ‘삼례철교’… 노래를 불러대어 결국 초등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적지 가보지 못한 다리는 누구와 함께 건너볼까!’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