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봉 아래 고산면 삼기리 구안서(具安書). 서울에서 4년간 중학교를 마치고 오니 ‘세상 이럴 수가!’ 할 정도로 한심한 데가 많습니다. 당내간 어른을 찾아가 “4촌-재종-3종 여동생의 인사가 없어 어찌 보면 남남 같습니다. 타성 여자들은 오다가도 돌아서고 인척 형제들도 사립문 뒤로 숨습니다.”, “한글 공부를 시켜 이 상태를 고치고 싶은데 하락해주시지요”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구안서는 4촌 재종 몇을 불러 ‘한글 공부에 동참할 의사가 있느냐’고 떠 보니 좋다며 손뼉을 칩니다. 안서는 ‘1인당 두 사람을 더 데리고 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오빠! 그 건 걱정 하지 마세요, 오씨 처녀들까지도 끌어올 수 있지요.” 한 발 앞서 나갑니다. 마당에 차일을 치고 석유램프 여러 개를 내어 걸었습니다. 안서는 동생들의 내심과 표정이 달랐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공부는 일주일에 3일(밤:9∼11시) △교재는 구안서 지음『말 따라 한글』. 지도결과 상-중-하 차이가 별로 나지 않고 왁자지껄 흥미중심 학습이 잘 진행 중인데 반란(反亂)이 일어났습니다. ▲집안 아주머니들이 ‘우리도 구씨이다. 왜 우리는 빼 놓느냐?’ 이처럼 당당하신 줄 처음 알았습니다. 당장 허락하니 만세소리가 나왔지요. 100날이 지나자 한글 편지가 오갑니다. 마을 분 누구나 오시도록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러고서 3개월 한글 공부 마당이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구안서는 지니고 있던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47년 초여름 스물일곱 살에 눈을 감았습니다. 부녀자들은 전원이 소복하였고, 청년들은 마지막 우정이라며 추를 입었습니다. 흰 두루마기 500여 조문객이 들을 덮었습니다. 상여는 뒤 내를 건넜고, 산기슭 나무꾼들 쉬는 바탕 거리 가까이에 묻었습니다. 통곡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습니다. ‘1948년 5월 10일(제헌의원 선거) 고산 5개면에선 구안서 아니면 아니 된다’는 여론이 확 돌았습니다. 능성구씨 집안도 이런 인물 100년 걸려 나오기 어렵고 지역에서 신언서판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안서가 죽다니!’ 삼기 소양 주민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가르치면 뭣 하느냐?’, ‘배우면 뭣 하느냐?’ 1948년 이래 70년이 넘도록 삼기 소향리에서는 면장 하나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필연입니까 우연입니까. 죽어 이만한 인기, 추하게 100년 살아 무엇 합니까? 필자는 지팡이를 끌고 구안서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길이 넓혀지며 지게 바탕이 사라졌고 무덤은 보이지 않으며 구절초만 만발했네요. 요리 조리 솎아 꽃다발을 만들어 오는 길에 구안서 여동생 순서를 찾아가 주었지요. ‘오라버니! 내 손으로 만든 저녁 한 끼 들고 가지요…’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종편집: 2025-06-24 1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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