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농 시절 지주가 관평(觀評:농사 평가) 나오면 작인은 가슴이 두근두근 기가 죽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공출(供出)이라 해서 농산물을 빼앗겼지요. 이러니 ‘무얼 먹고 살았겠소!’ 죽지 못해 숨을 쉰 것입니다.
해방되어 유상토지분배! 명분은 좋았습니다만, 가을이면 ‘상환곡(償還穀)’과 수득세(收得稅)를 내야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부담이었던지 논배미서나 밭두렁에서 한숨만 내쉬었지요.
비료는 없고 물길은 멀며 쟁기질 등 농비(農費)는 무겁고 우환까지 겹치면 목을 매고 싶었는데, 6·25전쟁까지… 목구멍 풀칠하기 위해 논을 파는 참혹한 세상 ‘가련타!’ 서로 봐줄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로 살기 어려웠다는 얘기입니다.
홍수출하! 시장에 내다 팔고 돌아와 집집마다 울음소리였습니다. 지금 농촌 후배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농촌에서 자기 살림 하나 하기도 어려운데, 남의 농산물까지 팔아주며 제값 받게 하는 단체가 농업협동조합이죠. 국영석·유해광·조한승 등 존경하는 분이 많습니다.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이사장 조한승)이 전북혁신도시에서 ‘영광과 개척의 싸움(?)’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새 도시이니 먹을 게 필요하지요. 시민을 위해 조합을 꾸며 조합원과 이사장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조한승 이사장 꼭 성취해야 합니다. 성취가 완주의 성공입니다.
△조창복 조상님이 논산 석성(지금 부여)에서 비봉면 죽산에 들어와 정착했지요. 평양조씨입니다. 고려 말 조선 초기 의로운 신하 조견(趙 )의 후손입니다. 경기도 성남시 여수동 선영이 으리으리합니다.
비봉은 인물의 고장이라 하여 나가도 출세한 사람이 많습니다. 어디를 간들 못 먹고 살겠습니까? 그러나 ‘고향 사람과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고귀한 인애정신으로 농사와 식품개발을 하지만 큰 벽은 바로 파는 일입니다. 경쟁이 너무나 심하지요. 이 전선에서 지면 조씨도, 농민도, 완주도 참담합니다.
벌 나비 없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꽃을 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일이 맨손으로 뱀장어 잡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까다로운 젊은 여성들의 취향과 안하무인의 비위를 맞추기는 몸살에 마라톤보다 더 힘이 듭니다.
상품 안 팔려 회수해가는 조합원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지게 부숴버리고 싶었던 아픔을 아는지라 여러분의 성공을 빕니다.
고산금융조합이 있었지요. 그 규모 지금 마을금고(혹 신협) 정도라고나 할까요. 서른일곱 살 고산 박양재 씨가 여기 이사였는데,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완주군내 여러 조합장 모두 큰 꿈 이루기 바랍니다. 팔기 힘든 농산물 손 고운 주부가 많이 사가야 합니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