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까지만 해도 ‘인심(人心)’이란 말 자주 썼고, 고마운 인심 얘기를 나누었다. 특히 ‘시골 인심’은 도시 인심과 비교가 됐고, ‘아무개 인심 잃었다’하면 상종(相從)을 꺼렸다. △들녘 인심은 오늘날 보험(保險)이나 상조회(相助會)의 원조이다. 들녘은 산이 없거나 아주 멀어 초상이 나면 묘 쓸 데까지 운구가 문제이다. 차라리 추위가 나았다. 여름철 3일 출상(出喪) 상여 메고 30리를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물이 줄줄 흘렀고 이 험한 일 누가 달갑게 여기겠나. 인심을 잃으면 방안에서 송장 썩었다. 이러므로 인심 얘기를 한다. ▲방에서 시체 썩히는 동네도 문제이지만 ▲상여 멜 사람 없이 살아서는 사람이 아니다. 이래서 상여계(喪輿契)를 맺었고 ‘죽어 장지까지 메고 갈 사람이 있어야겠다.’며 덕을 베풀었다. 논밭 일만 품앗이가 아니라 치상도 품앗이 ‘제1호 인심’에 들었다. △들녘 동네는 장지가 문제이었다. 시체 아무데나 묻을 수 없어 산을 찾아야 했는데 남의 산은 아니 된다. 산 없는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 이래서 조상님들의 ‘지혜가 으뜸’이었다. 종중산(宗中山)이 그것이다. 큰 자랑 거리이다. 이래서 ‘아무개 씨 세천(世阡)’, ‘세장지(世葬地)’ 비석을 세웠다. 사후 대비요, 씨족결합의 요소이었다. 성묘 길에 일가를 만나면 촌수 항렬을 떠나 반갑게 여겼다. 시제 때에는 묘하(墓下)에 많은 일가가 모이고 씨족마다 화합-단결-존경 독보적인 문화를 들어냈으며, 이게 수백 년 민족 역사로 이어져 내려왔다. 집집마다 훌륭한 여인이 많다. 손자-아들-며느리-조카 잘 되라며 찬밥 한 덩어리라도 나눠 먹었고, 일가친척에게 후하게 베풀어 집안을 지탱시켜 나갔다. 이런 어른이 가시는 날 “내가 그 은공 갚을 일이라고는 오직 ’상여 메기’ 뿐”이라며 달려들었다. 독자 여러분의 어머님·할머님·아버지·할아버지 이야기이다. 고산면 삼기리의 손명식·손창식 형제 분(손현배 조부)이 노년에 작고하자 마을 사람들이 울었다. 우리 민족은 곰(웅녀)의 전설과 역사를 잊을 수 없다. 마을마다 열녀·효부 비석에 실은 본인 이름은 없이 ‘아무개 처(妻)’로 새겨져있다. 마을 지나다 정려각 앞에 멈춰지는 게 정상이다. 삼례읍 해전리의 김해김씨-파평윤씨는 신씨(申氏) 집안의 고부간이다. 혼인해야 가정이 이뤄지고, 자녀가 있어야 인심 이야기기도 이어진다. 사람마다 후회 없도록 지갑을 열어 만원 한 장 써보아라. 죽을 때 누었던 자리는 침대 반쪽이다. 산에 묻히는 경우 가로 1m 50cm 세로 3m 구덩이면 관 푹 들어가며, 중장비가 흙 몇 번 퍼붓고 꾹꾹 누르면 ‘현고학생부군신위’로 끝난다. 자존심 뚝 꺾어 내던지고 소중한 인심을 잡아 두자.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종편집: 2025-06-24 17: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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